홍콩 ELS 피해 관련 토론회 열려
5대 은행, 투자금 대비 52.8% 손실
“고위험 상품 판매부터 잘못된 것”
금융소비자 보호법 위반 소지도
중국 망하지 않는 한 손실 없다더니…
부천시에 사는 국모(71)씨는 3년 전 노후 준비를 위해 모으던 4억원 상당을 홍콩H지수 연계 ELS에 투자했다. 당시 국씨는 다른 업무차 은행을 방문했는데 은행원이 “노후를 위해선 ELS가 안전한 정기 예금 상품이며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도 없다”며 권했다고 했다. ELS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국씨는 수십년 거래하던 주거래 은행을 믿었다. 지난 9일 만기가 됐는데, 2억원 상당 손실을 봤다. 손해는 큰데 지금까지 이 상품이 뭔지, 현재 어떤 상황인지 누구 하나 국씨에게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왔다.
양정숙 국회의원이 주최한 ‘금융소비자 보호에 취약한 한국금융의 과제와 대안’ 토론회 장소에서 만난 국씨는 “억울해서 잠도 안 온다. 아내는 무릎 수술을 해 잘 걷질 못하고 나도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대체 이게 무슨 상품이고 어떤 상황인지 알려고 오늘 왔다”며 “애초에 이렇게 고위험 상품을 은행에서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팔아도 되는가”라고 토로했다.
홍콩H지수 연계 ELS 손실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관련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리자 국씨처럼 막대한 손실로 애 태우는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피해자들의 ‘성토의 장’이 된 토론회에선 해당 ELS 판매가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소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금융기관의 적절한 보상, 금융당국의 관리 감독 강화 등도 촉구됐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이 판매한 홍콩H지수 연계형 ELS 상품에서 올해 들어 지난 19일까지 4천353억원 중 2천296억원의 원금 손실이 발생했다. 투자금 대비 손실률이 절반이 넘는 52.8%에 달한 것이다. 해당 ELS 상품은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통상 3년 뒤 만기가 됐을 때 가입 당시보다 H지수가 70% 아래로 떨어지면 하락률만큼 손실을 보는 주가연계증권이다. H지수는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중 50개 종목을 추려 산출한다.
ELS 손실률은 향후에도 커질 전망이다. H지수는 2021년 2월 1만2천선을 넘으며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으로 하락세다. 지난해 마지막 거래일(지난달 29일 기준 5천768.5)과 비교해도 현재 H지수는 11.1%나 떨어졌다. H지수가 반등하려면 중국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야 하는데, 갈수록 심화하는 미·중 갈등과 부동산 경기 악화 등으로 당분간은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손실률이 커지자 피해를 주장하는 투자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 홍콩 ELS 판매, 금소법 위반 소지 “불완전 판매 아닌 사기적 판매”
투자자 피해 현황과 ELS 판매 금융기관의 책임 소재, 금융당국의 대책 마련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이날 토론회에선 금융기관의 해당 ELS 판매는 금소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21년 3월 시행된 금소법은 금융투자업자가 일반인에 투자를 권유할 때 지켜야하는 의무로 ▲설명의무 ▲적합성 ▲적정성 ▲불공정영업행위 금지 ▲부당권유행위 금지 ▲허위·과장광고 금지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 중 하나라도 위반하면 불완전판매에 해당하는데, 해당 ELS 상품을 판매할 때 이런 원칙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제를 맡은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상임대표는 “해당 ELS 판매 과정에서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에 적용되는 투자자 보호 장치가 실질적으로 작동되지 않았다. 이번 ELS 상품 판매를 불완전 판매를 넘은 ‘사기적 판매’라고 보고 있다”며 “금융감독원은 과거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이후 고난도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투자자 보호 취지로 녹취 의무나 설명 의무 등을 강화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며 실질적으로 투자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번 상품 판매 과정에서 설명 의무 강화가 제대로 작동됐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 절차와 관련해선 일괄 적용 구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번 사태에 대해 정부는 최대 80%, 최저 40%로 분쟁 조정에서 배상을 결정하고 나머지는 분조위 배상 기준에 따라 은행과 자율 조정 방식으로 배상하도록 할 것”이라고 언급한 김 대표는 “그 방식은 잘못됐다. 누구는 설명을 제대로 하고 누구는 제대로 안 했는지 다투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 일괄 적용해서 구제해야 된다”고 설명했다.
■ 근본적인 보완책 필요 “은행 고난도 금융상품 판매 중지해야”
향후 이 같은 판매 행위로 발생할 수 있는 투자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선 고난도 금융상품을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어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 금융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백주선 변호사는 “ELS 상품의 경우 상품 구조 자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은행이 판매할 때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적합성과 적법성을 다 위반한 것이다. 1차적으로 원금 손실이 가능한 상품을 은행에서 팔면 안 된다”며 “사후적 규제를 위해 집단소송 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고, 금융소비자보호원도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토론회를 주최한 양정숙 의원은 피해자들과 함께 홍콩 ELS 사태에 지속 대응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양 의원은 “첫째는 피해 현황에 대한 엄격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며, 두 번째는 완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셋째는 재발 방지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