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로 역사를 바꾼 사례가 허다하다. 우리 역사엔 서희의 세치 혀가 대표적이다. 거란의 1차 침공을 외교 담판으로 물리치고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거란엔 조공 외교를 약속해 회군의 명분을 줬다. 대신 조공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여진 토벌을 양해 받아 강동 6주를 설치하는 실리를 챙겼다.
도시국가들 사이의 이합집산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수사학이 고도로 발달했다. 칼 대신 말로 싸워 이기는 실리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유명한 에피소드, '멜로스의 대화'는 수사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아테네 사절은 항복하라 협박하고, 멜로스 대표는 평화를 구걸한다. 설득하는 논리의 충돌은 불꽃을 튀기는데, 협박은 우아하고 구걸은 품위를 유지한다.
하지만 논리적인 수사 보다 저잣거리의 막말이 설득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세계정복에 나선 칭기즈칸은 적들을 원색적인 초원의 언어로 협박했다. '저항하면 죽고 항복하면 산다'. 실제로 그랬다. 논리도 수사도 없지만, 언행일치로 칭기즈칸의 원칙이 됐다. 만일 아테네가 칭기즈칸처럼 협박했다면, 멜로스 사람들은 항복했을지 모른다. 멜로스인들은 설전에선 비겼지만 전쟁에 져 아테네의 노예로 전락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해 11월 "5천만이 쓰는 언어를 쓰겠다"고 밝혔다. 국회의원 300명만이 쓰는 여의도 문법은 여의도 사투리라 했다. 현재의 정치를 여의도 사투리로, 자신의 정치를 5천만의 언어로 상징화한 근사한 수사가 대중의 귀에 쏙 박혔다.
한 위원장이 곤경에 처했다. 김건희 명품백 대응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진노를 샀다. 둘 사이 틈이 벌어졌다 싶자 즉각 여의도 사투리가 쏟아졌다. 야당은 '약속 대련'이라 하고, 여당의 한 친윤 의원은 한 위원장 퇴진에 앞장섰다가 뻘쭘해졌다. 서천 화재현장 회동으로 한·윤 갈등설이 봉합되자 급기야 이재명 민주당 대표까지 등장해 "절규하는 피해 국민 앞에서 정치쇼를 했다"며 정쟁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이 대표는 '진짠 줄 알더라'는 여의도 문법의 대가다. 평생 법의 언어를 구사했던 윤 대통령도 정치문법에 찌든 측근들의 보좌를 받고 있다. 한 위원장은 안팎으로 여의도 사투리에 갇힌 형국이고, 언론과 대중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한다. 한동훈의 '5천만의 언어'가 검증대에 올랐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