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6년만의 신작 소설 ‘갈래의 미학’
가치관 분리된 글, 지금 내 가치관
갈래길 앞 선택보다 성장이 중요
나는 작가라는 자의식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었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인생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치도 더 잘날 거 없었으니 나는 참으로 대단한 빽을 가졌다 하겠다.
차분한 목소리로 낭독했지만 그의 입술이 이따금 미세하게 떨렸다. 2014년부터 노트북 배경화면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자필 원고. 고민이 많아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읊는다는 이 글은 자기암시를 거는 일종의 ‘라이트모티프’*다. 첫 인터뷰라 긴장한 기세가 역력한 젊은 작가는 낭독을 마치고선 6년 동안의 조용한 사투를 떠올렸다.
“앞선 수많은 선배 작가들의 말이 맞았죠. 일단 등단을 하면 모든 게 순조로울 줄 알았거든요. 현실에 지쳐서 1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한 적도 있었어요.”
작가 지망생들에게 언론사 신춘문예는 등단 보증수표다. 허나 밥벌이까지는 보장하지 못한다. 등단 당시 그의 나이는 29살. 그에게도 어김없이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갖고, 일상과 아등바등 싸우면서 겨우 완성한 글은 발표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잠시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다시 묵묵히 소설을 썼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소설을 쓸 때 가슴이 뛰거든요. 이런 제가 소설을 어떻게 놓을 수 있겠어요.” 그는 낮에는 어린이들에게 독서와 작문을 가르치는 글쓰기 선생님, 늦은 저녁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소설가다. 전업 작가처럼 온 시간을 쏟을 수 없지만, “힘듦을 이겨내고 ‘이렇게 해서라도 쓰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면 소설이 애틋해진다”고 이야기한다.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자(2018년 1월2일자 12면 보도=[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린을 찾아가는 길) 황윤정(35)의 첫 단행본 ‘갈래의 미학’은 이런 기나긴 고민의 밤을 지나고서 독자를 찾아온 책이다. 책에는 동명의 표제작과 수록작 ‘보름’이 담겼다.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이기도 하다. 운 좋게 소설집이 나온 건 아니다. 등단 이후 황윤정은 부천신인문학상과 김포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지역 문단에서 젊은 작가로서 저력을 차근차근 증명해왔다.
표제작 ‘갈래의 미학’은 화자인 ‘나’와 ‘세라’라는 두 여성이 자신들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을 직면하고, 저마다의 속도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핵심 배경은 미국령과 캐나다령으로 나뉜 두 갈래의 나이아가라 폭포. 모양도, 유속도 다르게 흐르던 물줄기는 다시 만나 하나가 된다. 두 여성의 삶도 나이아가라 폭포와 맞물린다. 성격은 물론 경제적 계급까지 너무도 상반된 두 여성을 묶는 구심점은 다름 아닌 ‘사랑’, 그 추동력은 ‘의심’, 그리고 시작점은 ‘동성’이었다.
다양성을 소재로 삼는 최근 한국 문학의 경향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특히 소설은 ‘성격이 상극인 두 주인공의 갈등’이라는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에 ‘퀴어’라는 요소를 더해 사회성을 담아냈다. 그러고선 이를 지팡이 삼아 보편적인 삶의 아이러니를 들춰간다. 사랑이란 감정을 에둘러서 규정하려는 화자에게 “관점에 따라 본질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31p.)”라고 반박하는 세라의 대사는 평범한 이야기가 문학이라는 예술로 확장하는 주요 장면 중 하나다.
“2019년에 직접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엄한 광경을 보고 영감을 얻어 ‘갈래의 미학’이란 제목부터 정했어요. 다른 형태로 흐르던 폭포가 뒤늦게 하나로 만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모습. 이게 인생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세라의 입을 빌려서 화두를 던지고 싶었죠. 물론 세라의 관점이 제 관점인 것은 아니에요. 소설을 읽고서 어떤 독자들은 화자에게, 또 어떤 독자들은 세라에게 공감할 수 있겠죠.”
황윤정에게 화자와 소설가는 완전히 분리된 인격체다. 다만, 멀찍이서 ‘화두를 던지는 일’은 신춘문예에 막 당선될 당시의 황윤정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답변이다. 2018년 그는 당선 소감에서 “소설로 나를 드러낼 수 있어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 무수한 고민의 밤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그의 가치관도 달라졌다. 갈림길을 마주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탄생한 배경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아마 이런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제 가치관을 드러내는 게 즐겁다.’ 그런데 요즘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화자와 소설가를 구분하고 싶달까요. 한 발짝 떨어져서 화두를 던지는 게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두 갈래로 뻗은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건 우리네 모습이기도 하다. 소설은 틀린 방향은 없다고, 흔들릴지라도 어제보다는 한 뼘이라도 성장해 저마다의 속도로 목표점에 기어코 도달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한다. 어쩌면 나이아가라 폭포의 갈래가 드러낸 미학은 독자에게 가닿기 이전, 작가인 황윤정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소설을 집필하면서 생각이 뚜렷해졌어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소설 다운 소설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해가는 작가이고 싶어요. 2018년의 저와 2024년의 저는 쓰는 글도 다르고 똑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자꾸 변화하는 제 모습이 좋은 거 같아요. 올해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겁니다. 매 순간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 라이트모티프: 악극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심 악상을 가리키는 용어. 예컨대 주인공이 죽는 오페라가 있을 경우, 그전부터 계속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하는 선율이 되풀이된다. 라이트모티프는 소설 ‘갈래의 미학’을 이끌고 가는 또 다른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세라는 말했다. 이제는 연극이나 문학 등에도 쓰이는 개념인 라이트모티프가 우리의 인생 속에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무심코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심각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종의 중심 악상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