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과 구설수·조카 부정합격 유배
파란만장한 삶… 문학적 능력 인정
새로운 시풍 실험엔 언제나 정점에
詩에 자기만의 목소리 '개성론' 주장
그는 강릉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탄핵받아 파면되고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았지만 기생과 놀아나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과거시험에 조카를 부정합격 시킨 사실이 드러나 유배를 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27일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는 등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사회가 금기시 하는 문제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자각된 민중의 힘을 역설한 호민론(豪民論)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아도 진보적인 주장이다. 그의 사상이 배경으로 깔린 작품이 '홍길동전'일 것이다.
광해군 10년인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었다. 그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 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를 받게 된다.
서얼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가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관리들이 매달 치르는 시험에서 매번 일등을 했다. 그를 비방하던 사람들조차 그의 문학적 능력을 인정했다. 허균은 여러번 탄핵당해 파직되어 귀양 갔지만 다시 일어나 벼슬길에 복귀하곤 했다.
그는 언제나 현실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목표를 세우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역모를 꾀하다 49세의 나이에 능지처참 형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허균이 활동하던 선조와 광해군 시절에는 문예적 역량이 꽃피던 시기였다. 역량 있는 문인들의 창작활동이 활발해지고 창작과 비평 양쪽에서 새로운 시풍에 대한 실험이 실천되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 언제나 허균이 있었다.
허균의 문학적 주장은 개성론이었다.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며 이백과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 사람으로서 시 짓는 자들은 문득 말하기를 나는 성당(盛唐)이다, 나는 이두(李杜)다 라고 스스로를 내세우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그 말을 표절하고 어떤 이는 그 뜻을 표절하여 모두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다시 얽으면서도 스스로 크다고 뽐냄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썼다. '저는 제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거나 송나라 시와 비슷해질까 봐 염려합니다. 당대의 시인들이 유행에 민감하고 시류에 촉각을 세우며 유행에 뒤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할뿐 무엇을 노래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으니 세상에는 고만고만한 시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말과 뜻을 주워 모아 답습하고 표절하면서 스스로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시도(詩道)를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한다.
모두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경계가 되는 그의 지적이다. 허균의 허자지시(許子之詩) 선언은 한국시단의 비평사에 의미 있는 비평이다. 훗날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지으리'라고 한 조선 시 선언도 허균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뒷사람이 지금의 글을 봄이 어찌 지금 우리가 앞의 몇 분의 글을 봄과 같지 않겠는가? 하물며 거침없고 아득하게 말하는 것은 크게 되고자 함이요 옛것을 본받지 않는 것은 또한 홀로 우뚝 서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의 대상이 되겠는가?'라고 가르친다. 오늘의 시인들이 되씹어 볼 말이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