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느리고 때로 소란스러워
정치가 스포츠 된다면 '끔찍한 일'
정치인들 권력다툼 매달리지 말고
국민목소리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총선엔 좀더 겸손한 인물 선출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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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연초가 되면 떠오르는 책이 있다. 페터 빅셀의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전은경 역, 푸른숲 간)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안부를 묻듯 두루 살핀다. 누렇게 바랜 종이가 정겹다. 중간중간 귀퉁이 접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지레 반가워 밑줄 쳐둔 문장을 다시 읽는다. 글과 함께 과거의 나를 읽는다. 거기 10년 전, 혹은 그 이전의 내 모습이 오롯이 들어 있다. 피식 웃어보기도 하고, 이따금 상념에 휩싸이게도 된다.

처음 읽었을 때 크게 위로받았던 기억이다. 독서욕이 왕성한 때였지만 이 책만큼은 부러 천천히 읽었다. 종일 도서관에 파묻혔다가 정리되지 않은 사유의 조각들과 함께 귀가하면 곧 쓰러져 잠이 들 법도 했건만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이 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며 읽었고, 읽은 부분을 다시 읽었다.

"나는 글을 읽거나 쓰기 위해 기차를 탈 때가 많다. 조바심은 읽기와 쓰기의 적(敵)인데, 기차는 나를 인내심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내가 취리히나 프랑크푸르트 또는 베를린으로 가고 싶거나 가야 해서 기차를 타는 경우도 자주 생긴다. 사실, 이때 역시 일을 하기에 좋은 기회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면 기차에서 글을 쓰기가 불가능해진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지방 강의가 잦은 시절이었다. 부산으로, 순천으로, 대구로, 대전으로 주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요즘은 잠부터 청하지만, 10여 년 전의 기차는 내게 움직이는 도서관이면서 사색의 공간이었다. 오며 가며 책 한 권씩 뚝딱 읽어내기도 했다. 내려갈 때 읽은 책이 좋으면 그날 강의가 좋았고, 올라올 때 감동적인 책을 읽고 나면 고단했던 여정조차 감동으로 다가오곤 했다.

페터 빅셀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두드러지게 자기주장을 드러내지 않지만, 어김없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반복되는 장편(掌篇) 형식의 글들이 슬며시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와 감정을 굽이치게 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발리의 사제는 그저 가끔씩만 오리를 가리킨다'다.

발리의 사제는 뭔가 필요하면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킨다. 그럼 가질 수 있다. 오리가 필요하면 오리를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사제는 오리를 자주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가끔씩만 오리를 가리킨다. 사제는 현명한 사람이며,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 "사제들은 피곤해. 엄격한 학교를 다녔고, 산스크리트어와 또 다른 언어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평생 배우고 또 배우지. 마침내 사제가 됐을 때는 이미 무척 늙었다네. 권력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피곤한 상태지."

현명함은 피로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피로는 신중함이라는 뜻이다. "뚱뚱한 남자들을 주변에 두라."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한 말이다. 뚱뚱한 남자들이란 느리고 신중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효율성과 속도를 중히 여기는 요즘 세태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며 넉넉한 일상을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 포기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얼 꿈꾸고, 무엇을 위해 살아간단 말인가.

민주주의는 너무 느리고 때로 소란스럽다.

하지만 정치가 너무 빨라지고, 정치가 스포츠가 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요즘 정치인들에게서는 피곤한 기색을 발견하기 힘들다. 저마다 번드르르한 얼굴로 나타나서 느끼한 말만 한다. 그들의 품성 낮은 정치 행태를 보면서 국민이 되레 정치를 걱정한다.

부디 정치인들이 좀 더 신중하고 겸손해지면 좋겠다. 발리의 사제가 아주 가끔씩만 오리를 가리켰듯 정치인들 또한 권력다툼에 매달리지만 말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정치를 해주면 좋겠다. 22대 총선에서는 좀 더 겸손한 정치인이 선출되길 바란다.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