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등 행방묘연 1960~70년대 작품들
KBS 수원센터 수장고에 있던 필름 실사
6월 발굴복원전서 디지털 영상으로 상영
달리는 기차 안의 두 남녀, 흑백 화면 사이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은 앳된 모습의 엄앵란과 신성일이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두 연인 뒤로 행인들이 철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가로지른다. 후시 녹음으로 더빙한 배우의 대사는 영화 '거미집(2023)'(10월5일자 15면 보도=영화 마니아 '시네필' 다룬 2개의 개봉작 톺아보기)에서 그리던 대로 요즘 말투와 사뭇 다르다.
1960년대 한국식 멜로 영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평가받는 정진우 감독의 '배신(1964)'은 그동안 원로 영화 제작자와 평론가의 증언만 무성하고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영화 본편은 물론이고 시나리오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사의 르네상스기로 평가받던 1960~1970년대 제작된 주요 작품 중 행방이 묘연했던 영화를 디지털 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배신'을 비롯해 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다섯 편의 필름을 발굴해 디지털로 복원하면서다.
지난 26일 한국영상자료원은 간담회를 열고 "그간 유실돼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극영화 16편 등을 완본으로 발굴했다"고 밝혔다. 재작년 수원시 인계동에 위치한 KBS 수원센터 수장고에서 발견한 총 88편의 극영화 필름을 파주보존센터로 이관해, 정밀 실사를 실시하며 찾아낸 것들이다.
88편의 16㎜ 필름에서 건져낸 극영화는 각각 그간 필름이 유실됐던 16편, 일부 장면 등이 훼손됐던 불완전판 19편이다. 필름에 담긴 영화들은 대개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 제작됐으며, 멜로드라마·사극·반공물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됐다. 정진우, 김수용, 임권택, 장일호 감독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발굴한 한국 고전 영화 필름은 영화사적으로 가치가 상당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라 불리던 1960년대를 실증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서다. 이 시기는 앞선 1950년대에 비해 양적·질적 모두 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장르 형성과 감독의 연출론이 차츰 형성되기 시작한 때다. 국내는 물론 해외 시네필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김기영의 '하녀(1960)'도 이 시기 탄생한 작품이다.
이날 김종원 영화사학자는 "1960년대 한국 영화는 행복한 시기였다. 정부의 지원이 밑받침되고, 좋은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이 만나면서 제작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80여 편 남짓 제작되던 게 1969년에는 229편으로 늘었다"며 "양적인 풍요로움에 더해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정진우 등이 만든 뛰어난 영화들이 시대를 풍미했다. 이런 관점에서 1960년대 한국 영화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필름은 극장용 판본이 아닌, TV 방영본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지평을 넓힌다. 1960년대 프로그램인 'KBS 시네마' 등에서 영화를 방영할 때 사용한 필름으로, 일종의 방송 가이드라인에 맞춰 편집이 이뤄졌다. 매체환경과 검열·편집 등으로 분류해 두 판본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논의를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88편의 필름 중 디지털화를 마친 정진우 '배신(1964)', 안현철 '어머니의 힘(1960)', 이병일 '서울로 가는 길(1962)', 김기 '목메어 불러봐도(1968)', 김수용 '석녀(1969)' 등 5편은 오는 6월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발굴복원전'을 통해 공개 상영될 예정이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