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전후소설 전쟁 낱낱이 기록
당시 여성사회참여 등을 다룬 그녀
심리 묘사해 독자적 문체미학 건설
내적 감정 정밀하게 표현 기념비적
실존의지 탐색에 공력 다한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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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한국전쟁 직후 우리 소설은 참화로 인한 피해의식과 그 결과로 빚어진 이념적 배타성을 한 축으로 삼고, 인간 소외와 불안 현상을 또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그 시대 작가들에게 전쟁의 충격은 물리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너무도 큰 것이어서, 전후소설은 전쟁 체험을 인간의 가치 상실 과정으로 낱낱이 기록해갔다. 하지만 작가들은 어느새 새로운 질서 회복을 지향해가기 시작했는데, 가령 제한된 사상적, 시간적 조건 속에서도 예술적인 문체 미학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강신재(康信哉)는 그러한 문체 미학 건설의 선두 주자였다고 할 수 있다.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에서 수학한 강신재는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에 단편 '얼굴'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그 후 회화(1958), 여정(1959), 임진강의 민들레(1962), 젊은 느티나무(1972) 등을 펴냈는데 90여편의 중단편과 24편의 장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의 소설은 예술적으로 탄탄한 문장과 서정적 이미지를 결속한 독자적인 문체를 보여주었다. 치명적 근친상간, 성적 타락, 애정 윤리의 파탄, 본질적 소외와 고독 등의 주제를 주로 다루면서도 그녀는 낡은 가치 판단을 부여하지 않고 그러한 양상들을 감각적 문체로 담아냄으로써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강신재 소설은 정밀하고 인상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면서 외적 행동이 아닌 내적 심리가 주로 제시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에서도, 그녀는 조선시대의 여성이 남성을 통해서만 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음을 여성의 눈을 통해 비판하였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녀는 옛 시공간 속 인간 심리의 변화, 당대인들의 맹목적 권력 추구와 가족 파멸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남성 중심의 권력 지향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것이다. 그만큼 강신재는 내적 감정을 가장 구체적으로 육화하는 독자적 미학을 건설하였다. 그 점에서 강신재 소설은 전후 작가 가운데서도 단박에 눈에 띄는 수준 높은 예술성과 역사성을 함께 보여준 것이다.

강신재 초기 소설은 주로 남녀의 애정 모럴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여 그들의 생태를 리얼하고도 감각적인 기법으로 그려내는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계부의 이복오빠와 오누이 아닌 오누이 관계에서 순수한 남녀로 돌아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대표작 '젊은 느티나무'는 그녀를 전후의 대표 소설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사소한 습관이나 차림새 같은 데서 인물의 특징을 잡아 발랄한 생명체를 구성하는 특이한 인물 묘사 기법을 구사하였고, 세련된 감각으로 그만의 조화로운 서정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오직 창작에만 전념하여 문단에 품격 있는 작가상을 심어주었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현대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안겨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장편소설에 주력하면서 현대와 고전을 결속한 역사소설을 두루 보여주었다. 특별히 여성의 애정 세계에 대한 대담한 묘사를 통해 낡은 심리학적 범주를 탈피하고 정신분석학적 미의식의 차원을 개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래저래 강신재는 전후소설의 기념비적 작가였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선친도 강신재와 같이 1924년 갑자(甲子)생이셨다. 살아계셨으면 아버지도 탄생 100주년을 맞으셨을 것이다. 이제 우리 아버지 세대도 이렇게 100년 세월을 어깨에 얹고 계시는구나, 하는 울림이 온몸으로 끼쳐온다. 이분들 세대는 청년기에 해방, 분단, 전쟁을 모두 경험하면서, 급변하는 한반도 역사의 간난신고를 두루 관찰하고 표현해온 증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신재는 전쟁의 직접성을 증언하기보다는 전후의 폐허 위에서 새롭게 존재 탐색을 해가는 이들의 실존 의지를 탐색하는 데 공력을 다한 여성작가였다. 그럼으로써 이후 세대와의 가교를 놓는 선구적 역할을 떠맡았던 것이다. 이후 펼쳐지는 1960년대 이후 현대사에 귀한 자산을 물려준 이 세대를, 탄생 100주년이라는 모뉴멘트에 실어 깊이 기억하고자 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