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작품이 韓 근대소설 출발점인 이유
'혈의 누'·'무정' 작가 친일… 심리적 저항
1918년 배경… 근대 지식인 여행과정 서술
획기적인 문학… 미래 백년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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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
올해로 소설 '만세전'이 나온 지 꼭 백년이 됐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한국 근대소설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만세전' 앞에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도 있고,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도 있으나 '만세전'을 한국 근대소설의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문학적인 이유와 문학적이지 않은 이유가 함께 겹쳐 있다.

문학적인 이유는 '만세전'이 근대적인 의미를 담은 여로형 소설로 작품이 여행구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세전'은 제목 그대로 만세(萬歲)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直前)인 1918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연락선과 기차를 이용하여 동경과 서울을 왕복하는 주인공 이인화의 여정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근대 지식인의 여행 그 자체도 사건이지만, 주인공이 여행의 과정 중에 보고 듣고 관찰하고 경험하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고백하고 전달하는 내용들이 서사의 중심이다. 이와 함께 고려돼야 할 사항이 바로 가독성(readability) 문제다. 현대 일반 독자들이 충분하게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의 시간적 하한선이 '만세전'이기 때문이다. 이인직이든 이해조든 신소설은 말이 신소설이지 문체나 작품 구성 등이 고소설에 가까워 읽기가 쉽지 않고, 또 이광수 문학의 빛나는 성취라 할 '무정' 역시 계몽의 열정과 고소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문학적이지 않은 이유로는 정치적 무의식과 한국문학의 자존심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의 획기성은 자명하지만 그는 입신출세를 위해 스스로 친일의 길을 걷은 사람이고, 이완용의 통역관이자 개인비서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도 친일파였지만, '혈의 누' 자체도 매우 친일적인 작품이기에 '혈의 누'를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삼기에는 심리적 저항감도 크고, 무엇보다 한국문학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광수의 '무정'은 어떤가. 기실 춘원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이자 최악의 작가다. 그가 '민족개조론' 이후에 보여준 친일 행적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지경이어서 그의 '무정'을 근대 우리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매우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러니 이런저런 문제들을 다 고려하고 작품의 완성도 등을 기준으로 했을 때 눈에 띄는 작품이 바로 '만세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세전'은 한국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다행스러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만세전'은 원래 1922년 '신생활'에 '묘지'란 제목으로 연재하던 중 3회차가 총독부 검열에 걸려 작품은 삭제되고 잡지도 폐간됐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24년 4월6일부터 6월7일까지 '시대일보'에 59회에 연재를 마친 후 같은 해 8월 고려공사에서 초판이 간행되었다. 재판은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1948년 수선사에서 나왔는데, 현재 연구와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는 저본은 작가의 최종 수정본인 1948년 본이다.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이던 이인화는 조혼한 아내가 위독하다는 맏형의 전보를 받고 귀국길에 오른다. 다른 작품들에서 줄곧 근대의 표상으로 인유되곤 하는 연락선과 기차를 통해 귀국하면서 이인화는 일제의 부당한 압수수색에 고초를 겪기도 하고, 마치 묘지와도 같은 조선의 참혹한 식민지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작품은 이처럼 이인화의 관찰과 서술 그리고 이인화의 의식을 통해 서술된다. 그러나 이 여정을 통해서 식민지 현실을 발견하고 자아의 각성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인화는 행동파로 변신하는 대신 현실에 절망하고 하루 속히 동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의 인식과 상황은 여전히 만세 '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의 획기성과 완성도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면 우리 문학은 백 년 전의 '만세전'보다 얼마나 더 큰 성과를 이뤄냈을까. 그리고 인공지능과 각종 첨단 미디어의 공세 속에서 또 다른 백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