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었던 백남준 다시 떠올려
그의 예술 총체적 이해·외로움 공감
일방 아닌 쌍방 비디오아트로 소통
韓국적 지켜 34년만에 '금의환향'도
나는 백남준(1932~2006)을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작가로 기억하고 있다. 199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렸을 때 저쪽 한 구석에서 내 눈을 확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누군가 하고 다가갔더니 다름 아닌 '백남준'이었다. 색동옷을 표현한 듯 여러 색채를 이용해 죽죽 내려그은 자그마한 그림이었다. 아이들 그림 같은 한 장으로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압도하는 장면에 나는 '재능은 숨길 수가 없구나' 하는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또 199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열렸는데 그때 보았던 작품들도 기억에 남아있다. 화초 속에 보석처럼 빛나던 'TV 정원'과 12개의 모니터에 달의 여러 형상을 담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예쁘장한 불상이 모니터와 마주보고 있는 'TV 붓다' 같은 작품들은 새롭고 신선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때 나는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제목을 보고 그 기발함에 놀랐다. 모니터를 조작하다 우연히 발견한 달의 형상을 보고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달을 발견했어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요.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은 달이에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백남준을 다시 떠올린 건 현재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 달은 가장 오래된 TV' 덕분이다. 한국계 미국 영화감독인 아만다 킴이 5년을 공들여 만든 백남준 영화는 어려운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처음 영화를 보고는 백남준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서구 예술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백남준의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끈기와 인내의 전쟁을 수행중이야. 최후의 승리자는 분명히 내가 될 거고. 여기선(미국) 좀처럼 인재를 찾기 힘들거든"이란 표현에서 보듯 백남준은 자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스스로 등불이 되어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이 영화에는 백남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두 가지만 꼽고 싶다. 하나는 밑에 거대한 강물이 흐르는 고가도로에서 백남준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철기둥 난간을 세는 장면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외국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백남준에게 (비록 그가 6개국어를 한다고 하지만) 외국어는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내겐 매일이 소통의 문제다. 어떻게 해야 소통을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이 심각한 질문은 마침내 백남준이 일방적인 텔레비전의 소통방식을 버리고 쌍방이 주고받을 수 있는 비디오 아트를 찾아내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1984년에 전 세계로 위성 중계된 '굿바이 미스터 오웰'은 백남준이 찾아낸 최첨단 소통방식이었던 셈이다.
다른 하나는 백남준이 34년만에 귀국하는 장면이다. 부잣집 막둥이로 자랐으니 고국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18세의 백남준은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을 달고 쫓기듯 한국을 떠났고 이후 살벌한 국내 상황에 감히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공항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속에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이게 무슨 일이지?'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흥분이 고조된 백남준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금의환향'이란 저럴 때 쓰는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 구보타 시게코에 따르면 평소에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그날 남편과 동행하며 "그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새삼 알게 됐다"고 했다. 친일파 아버지와 일본으로 귀화한 두 형의 행보와는 다르게 백남준은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인 신분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가 숱했지만 34년간 한국 여권을 버리지 않은 채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백남준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