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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정조대왕과 함께 수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정조는 화성 건축으로 수원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창조했다. 나혜석은 파격적인 행보로 남존여비 시대에 저항했다. 정조가 왕조시대 수원의 역사적 시원이라면, 나혜석은 근대 수원의 표상으로 시 문화행정의 집중 지원 대상이었다.

나혜석이 문제가 됐다. 수원시청이 최근 나혜석의 '독립운동가' 기록을 삭제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인계동에 '나혜석거리'가 있다. 수원시가 2000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문화예술구역의 명칭이다. 거리엔 두개의 나혜석 동상이 있다. 한복 입은 동쪽의 나혜석이 서쪽의 양장 차림 나혜석을 마주한다. 동쪽 동상 조형물엔 나혜석을 '최초의 서양화가', '최초의 여성소설가', '최초의 전시회 개최',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로 새겨 놓았다.

나혜석의 독립운동 이력에 대한 시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1운동으로 5개월 투옥됐다는 사실이 유일한 독립운동 근거인데, 당시 일제의 신문조서 기록에 따르면 항일운동 가담을 부인하고 무죄 방면됐다는 주장과 충돌한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가 나혜석'을 부정하는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끊이지 않았고, 이번에도 한 시민의 반복적인 민원에 시청이 조형물 문구 삭제 계획을 밝힌 것이다.

나혜석의 삶은 지금 봐도 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찰정도로 반시대적이었다. 그녀의 생애는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여권 부재의 시대를 관통했다. 두 번의 결혼, 자유연애, 이혼으로 남성의 세계를 직격한 여류화가의 비극적인 서사는 후대의 관심을 받기에 족하다. 관심의 호오에 따라 나혜석의 평가가 엇갈린다. 시대에 저항한 선각자로 보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기행을 일삼은 자유연애자로 폄하하는 시선도 있다.

관점에 따라 엇갈리는 나혜석 평전을 역사로 규정하려니 문제가 발생한다. 남성 사회를 향한 도발적 행적은 여권운동의 빈약한 기원을 메울 만큼 신화적이다. 반면 친일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사회에서 독립운동은 명백하게 기록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신화만으로도 충분했을 나혜석에게 기록으로 확정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를 덧붙인 바람에 신화마저 퇴색하는 느낌이다.공공장소에 세운 인물의 공적 기록을 민원만으로 슬그머니 지우는 행위 역시 몰역사적이다. 지우면 그만일 기록이라면 지금껏 공공 조형물에 새겨 놓았던 이유가 묘연해진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