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만난 성소수자와 정치범


1976년 원작… 性으로 가른 시대정신 '인간적 합일' 승화
현대사회 속 혐오·차별 '오늘날 어떻게 볼것인가' 메시지
정일우·차선우 캐스팅 눈길… 3월까지 서울 예그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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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빌라 데보토 감옥. 낡은 나무 가구와 침대, 철창 사이로 들어오는 빛. 작은 감방 안에는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몰리나'와 반정부주의자 정치범 '발렌틴'이 수감돼 있다. 침대 위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표범여인'에 관한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사람은 아주 다른 듯했다. 차갑고 이성적인 발렌틴, 정치사상 등에는 관심없는 소극적인 몰리나. 입고 걸친 옷부터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까지. 그러나 이들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로 표현된 존재라는 점에서 묘한 공통점을 가진다.

존재하는 듯 지어낸 듯한 영화 이야기를 연결고리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점차 이해하고 가까워진 두 사람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에 출판된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마누엘 푸익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극은 2017년 삼연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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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프레스콜에서 배우들이 공연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4.2.2 /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푸익 작가는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갈라놓은 이데올로기를 두 사람의 인간적 합일이라는 구도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는데, 이번 시즌에는 이러한 희곡 본연의 매력에 집중한 무대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1976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을 오늘날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는 시간을 넘어 확장성을 가지게 됐다.

이는 전박찬 배우가 프레스콜에서 밝힌 "단순히 성소수자와 정치범의 로맨스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현대사회에서의 혐오와 차별, 억압, 우리 역사에 있었던 운동들과도 관련 있는 작품으로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극에 대한 생각과 맥락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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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프레스콜에서 배우들이 공연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4.2.2 /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박제영 연출은 "이야기가 2024년에도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발렌틴과 몰리나처럼 우리도 언제든 사회적으로 억압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며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사를 보며 위로받기도 하고, 자신을 폄하하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려고도 한다. 또 그 가운데서 살아가려 하고, 그렇게 사랑을 베풀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대적 억압들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각색을 맡기도 한 박제영 연출은 희곡의 문학성을 지키면서도 캐릭터가 잘 살아날 수 있도록 대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며 배우들과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했다. 감수성이 뛰어나면서 감정이 풍부한 몰리나를 재미있게 표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덧댔고, 강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가진 발렌틴은 체게바라와 같은 정치 혁명의 부분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특히 박 연출은 자신을 여성이라고 믿는 몰리나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여성이야'라고 주입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든 것에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고 했고, 이러한 주문에서 배우들 각자의 매력이 더욱 도드라지게 나오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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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프레스콜에서 배우들이 공연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2024.2.2 / 구민주 기자 kumj@kyeongin.com

이번 작품은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정일우와 국내 연극 무대에 데뷔하는 차선우의 캐스팅으로 눈길을 끌었다. 정일우 배우는 "유리알처럼 잡으면 깨질 것 같이 약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대해 솔직한 몰리나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캐릭터의 깊이를 알아가게 되고, 배우로서 배움도 늘어가는 연극 무대를 기회가 된다면 평생 하고 싶다"고 밝혔다.

건강상의 이유로 무대를 쉬다, 이번 작품으로 복귀한 최석진 배우 역시 소감을 밝혔다. 그는 "어쩌면 발렌틴이 가진 어려움과 내가 지금 겪는 어려움이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대에서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었다"며 "포용적 예술이라는 말이 가장 겁이 났다. 사람들이 저의 예술을 포용하는 마음이 아닌 예술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많이 준비했다"고 전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전하는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3월 31일까지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