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민주주의, 초기 낙관주의서
환상·환영의 '이미지 정치'로 변질
보여주고 싶은것 위주 정보 재생산
소수 전문가·추종자 좌우되지 않게
자동적 기제 벗어나 시민이 점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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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오래 전에 중고등학생들 논술시험에 단골 메뉴로 올라오던 주제가 있었다. 인터넷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겠느냐는 것이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는 시대로 막 접어들 때였다.

인터넷이 정보의 집중을 가져오고 민주주의에 장애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보다 인터넷 세계가 가져다주는 정보의 보급력이 세계를 더 민주적인, 곧 더 나은 세계로 만들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던 것은 당시의 낙관주의를 시사한다.

시간이 흘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2009)가 NHK 수금원 덴고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을 때 낯설다는 느낌, 그리고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TV 수신료는 지금 한국도 계속 문제지만 어떻게든 생겨날 수 있는 문제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흘렀다. 지금은 지상파 방송에 온갖 종합편성 채널이 생긴 것도 모자라 유튜브로 대표되는 절대 강자가 지배하는 인터넷 세상이다. 그것도 모자라 AI가 바야흐로 세계의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둑은 초고수도 네 점을 깔아야 AI를 상대할 수 있고, 삼성에서는 곧바로 전화 통역을 해주는 AI탑재 신형폰으로 휴대폰 세계를 다시 재편하겠다고 공언한다. AI는 정보를 집적하는 것에서 이제 편성, 재구성하고, 또 창조하기까지 한다. 챗GPT는 지금은 그런 수준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보통사람은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인터넷 세계의 민주주의는 그러면 어떻게 되었나? 과연 인터넷 덕분에 디지털 민주주의는 증대되고 있고, 세계는 더 민주적이고, 더 약자들의 편이 되었다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연말부터 새해 벽두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의 정치다. 이 이미지 정치는 보이는 화면에 분장을 하고 나타난다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촬영한 것들을 마음대로 잘라내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서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교묘하게 이어붙여 이상한 정보로 재생산하는 일들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없는 화면이 '공장'에서 만들어져 그럴듯한 진짜 화면인 것처럼 대중 앞에 버젓이 상영하는 환상 정치, 환영 정치의 시대가 바야흐로 개막되고 있다. 이미 막은 올라갔고, 그 무대를 누가 장악하느냐를 둘러싸고 몹시들 각축전을 벌인다.

이 환상정치, 환영정치를 위해 종사하는 이들이 디지털 언론 매체들과 정치세계는 물론, 시민단체를 표방한 단체들에 넓고 깊게 퍼져 있고 이들 사이에 무정형의 연계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시민들, 이미 일각에 의해 '가붕개'로 비웃음을 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깨시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조차, 이 환상·환영 정치에 마취 상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 디지털, 인터넷 민주주의의 극한적 위기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민주적, 사회적 절차들에 대해 소수의 전문가들, 음험한 기획자들, 권력에 자율적으로 엎드리는 추종자들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타이완에서 새 총통 선거가 치러져 탈중국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표차는 그리 크지 않았고, 때문에 정국도 앞으로 깨나 시끄러울 것 같다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이번 선거가 투표지를 일일이 손으로 개표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인터넷, 유튜브, AI 주도의 정치세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열어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컴퓨터와 인터넷, 전문가들의 자동적 기제에 맡겨두지 말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이를 점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모든 환상, 환영의 정치는 무식, 무도한 군사독재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섭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