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장소·배우 등 구상한 사진작가 윤정미

건물 옥상 쓰러진 120년 전 ‘빈상설’ 인물

난장이 없이 소설 속 장면 연출한 ‘난쏘공’

 

인천 다룬 소설 15편 각색한 사진 30여점

4월28일까지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

인천을 다룬 근현대 소설을 사진으로 재해석한 사진작가 윤정미의 전시가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은 윤정미 작가가 한국근대문학관과 함께 선정한 소설 15편을 읽고, 그 소설 속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해 사진 등으로 연출한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모두 신작이다.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전시장 모습. 2024.02.06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작가는 소설에 대해 조사하고 탐구하는 ‘내재화’ 과정을 거쳐 장면을 만들 장소·배우·소품 등을 직접 구상하고 준비했다고 한다. 각 작품은 일종의 프레임 안에서 구현한 ‘메타픽션’(Metafiction)처럼 보였다. 윤정미 작가는 젠더에 대한 질문을 던진 ‘핑크&블루 프로젝트’로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졌다. 2013년부터 근대소설을 각색한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대한 김명석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글을 먼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명석 교수는 “이번처럼 소설을 사진으로 각색하려는 시도는 문자 텍스트를 시각적 매체로 재창조하려는 새로운 욕망을 보여준다”며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과 소설을 비교하며 원작에 대한 ‘충실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 했다.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윤정미 作 빈상설 01, 2023, C-Print, 60×90㎝ /윤정미·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1907)을 주제로 한 작품 ‘빈상설 01’이 이번 전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원작의 시대 배경이 아닌 ‘현재’의 어두운 밤 건물 옥상이 배경이다. 흰 한복을 입은 여인이 여기저기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고, 옥상 너머 도시의 불빛들이 보인다.

120여 년 전 신소설 ‘빈상설’은 못된 첩(평양집)으로 인해 착한 본처(이난옥)가 고난을 겪다 결국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첩을 두는 당시 양반의 행태를 비판하고, 신분제 폐지나 신교육 주장 등 계몽적 주제를 다뤘다. 소설만 생각하면 윤정미의 ‘빈상설 01’이 낯설다.

이에 대해 김명석 교수는 “도시에 표류한 여성을 추모하는 듯하다”며 “전통과 근대 사이 희생된 여성들을 바라보고 있는 120년 전 소설가 이해조와 근대 인천을 찾아온 사진작가 윤정미의 대화의 장”이라고 했다.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윤정미 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2023, C-Print, 100×133.3㎝ /윤정미·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우리가 익숙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5)을 작가는 거의 다 철거된 집터에서 작은 밥상에 밥을 차려 먹는 지친 표정의 가족으로 찍었다. 전시작 중 가장 크기가 큰 사진(100×133.3㎝) 속 철거 현장의 무자비한 디테일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난장이가 등장하지 않는 이 사진은 원작과 다르면서도 작가의 시선으로 원작의 분위기나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 작품이 다룬 주제는 근대화, 산업화, 바다, 이주·이주민, 노동(동일방직 담벼락), 여성 등으로 인천의 도시 역사를 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다소 어둡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작품 가운데 강화도를 배경으로 한 김중미의 성장소설 ‘모두깜언’(2015)을 담은 사진은 소설처럼 따스하고 푸르다. 작가는 ‘매직아워’(magic hour·일출 또는 일몰 직후 촬영)에 소설 배경인 강화군 양도면의 한 농촌에서 작업했다.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윤정미 作 모두깜언, 2023, C-Print, 80×106.7㎝ /윤정미·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전시 작품에서 다룬 소설은 ‘빈상설’, ‘송뢰금’(육정수·1908), ‘모란병’(이해조·1909), ‘재생’(이광수·1924), ‘인간문제’(강경애·1934), ‘밀림’(김말봉·1935), ‘박명’(한용운·1938), ‘바닷가 소년’(한남규·196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국인 거리’(오정희·1979), ‘포구의 황혼’(이원규·1987), ‘새벽 출정’(방현석·1989), ‘중국어수업’(김미월·2009), ‘모두 깜언’, ‘중국인 할머니’(백수린·2015) 등이다.

소설 이외에 작가가 인천 앞바다 갈매기를 찍어 한옥 창틀에 가둔 ‘인천갈매기’ 시리즈는 전시 공간이 인천이란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한다. 작가 어머니의 자개 서랍에 이번 전시를 위해 읽은 소설의 글귀를 한지에 직접 써서 놓은 ‘…으로부터’, 이 모든 소설 속 인물들을 위한 듯 점토로 만든 ‘기도하는 손’ 등 설치 작품들도 전시돼 있다. 관람객이 직접 기도하는 손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전시는 4월28일까지다.

사진으로 읽는 인천 근현대 소설
윤정미 作 바닷가 소년, 2023, C-Print, 80×106.7㎝ /윤정미·한국근대문학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