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국가 대표지만 행정 수반
간난-자랑스러움사이 방황하는듯
앞 물결, 뒤따르는 물결이 밀어내
열흘 붉은꽃 없고 5년 권력 없다
'한걸음 물러나는' 법을 익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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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노자(老子)에게 세 보배가 있다. 첫째 자애, 둘째 검약, 셋째가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음(不敢爲天下先)'이다. 자애로우므로 용감하고, 검약하므로 베풀고 넓힐 수 있다. 세상에서 앞서지 않음으로 으뜸이 된다. 그런데 자애로움 없이 용감하고, 검약함 없이 베풀고, 물러서지 않고 앞서면 죽음 뿐이라는 거다.

갈무리하지 않는 권력은 덧없다. 주역도 '성인이 세상에 처함에 있어 한 걸음 물러난다'고 했다. 중천에 오른 태양은 이내 기울고, 하늘 끝까지 오른 용(龍)은 후회하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왕도 아닌 임기 5년 대통령이 아닌가. 제왕적이라지만 군주민수(君舟民水), 물 위의 배 신세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한다. 탕무(湯武)의 혁명도 걸주(桀紂)의 몰락도 민심의 바다가 부린 조화가 아니겠나.

그런데 권력은 흔히 성난 민심의 파도를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긴다. 재신임을 얻는 게 아니라 재창출한다고 자신만만하다. 정치를 공학으로 보고 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꿰어 맞추는 것이다. 그러다 몹시 혼나고도 여전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투표가 민심의 바다이다. 정권이 뜨고 가라앉는 것도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민심이 선택한 결과이다. 이른바 정권 재신임이 요순의 선양(禪讓)과 닮았다면 정권 심판은 걸주의 방벌(放伐)쯤이겠다.

여기에는 최고 권력자 주변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나라와 국민을 존중하는 공직자는 충신이라 하겠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권력자에 기생하는 공직자는 간신이겠다. 슬프다. 자고로 충신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자신과 자손을 해(害)하거나 상(傷)하기 일쑤였다. 반면 간신들은 역사에 오명을 남겼지만 당대에는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니 됩니다"는 충언은 사약(死藥)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는 아첨은 사전(賜田)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나. 그래도 조선왕조가 600년이나 지속된 것은 목숨을 걸고 "아니 됩니다"라고 했던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세난(說難)'에서 설득의 어려움을 설파한다. 특히 군주를 설득하기 어려운 것은 지식 부족이나 모자란 말솜씨 때문이 아니다. 상대의 심중을 헤아려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예를 높이려는 이에게 이익을 이야기하면 낮춰보고 멀리하며, 이익을 늘리려는 이에게 명예를 이야기하면 세상물정에 어둡다고 물리친다.

그런데 속으로 명예를 높이려는 이에게 명예를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멀리하고, 속으로 이익을 늘리려는 이에게 이익을 이야기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를 버린다. 왜 그럴까. 속마음을 들켜 언짢은 거다. 특히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권력자가 가장 감추고 싶은 수치스런 부분 말이다. 예를 들어 어제의 '친ㅇ'세력이 오늘 '비ㅇ'세력으로 자리매김 되는 게 꼭 본인들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의 마음이 달라졌을 수 있다. 맹자는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는다"고 했다. 반구제기(反求諸己)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쏜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지 않은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반구제타(反求諸他)가 아니겠나.

민의의 대변자와 일반 공직자도 요즘 난처(難處)한 듯하다. 민주주의 요체는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정립이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지만 행정부 수반이다. 입법은 국회 권한이고, 사법부는 기소독점주의의 들러리가 아니다. 한데 지금의 복록과 나중의 부끄러움, 당대의 간난과 후대의 자랑스러움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듯하다.

물론 시민으로 누항(陋巷)에 머물며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충성스런 공직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염치없고 미안한 일이다. 그럼에도 본디 공직이란 멸사봉공이 바탕 아니겠는가.

결국 모든 것은 변한다. 장강의 앞 물결을 뒤따르는 물결이 밀어낸다. 현재 권력은 미래의 권력에 밀려난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10년(아니 5년) 넘는 권력이 없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다면 한 걸음 물러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진일보(進一步)가 아니라 퇴일보(退一步) 말이다.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