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세든집 경매, 자긍심마저 무너뜨려
미추홀구 전세사기 '건축왕' 징역 선고 불구
생 마감 피해자만 4명, 위태로운 이들 여럿
정부가 내민 손, 국민에겐 아직도 멀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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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
"우리 전세금 돌려받을 수 있을까?"

전세 만기일이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들어올 세입자가 없으면 자기 가족이라도 들어오겠다던 집주인은 차일피일 날짜를 미뤘다. 걱정이 산처럼 높아져 가던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지금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붙여졌다는 내용이었다. 중개업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찾아갔더니 이미 며칠 전 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뒤였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고, 경매전문가도 만났다. 사실 불길한 예감이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까짓것 팔 걷어붙이고 나서면 사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 반장'이 내게도 당연히 나타나리라 믿었다. 세상은 그렇게 여유롭지도, 자비롭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 재산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돈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한복판에 느닷없이 생겨난 모래 늪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서서히 삼켜버렸다. 일에 대한 의욕, 세상을 향한 신뢰, 내일을 기다리는 자신감이 모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끝내는 내 가족을 나름 잘 건사해 왔다는 가장으로서의 자긍심까지 삼켜버렸다. 그게 가장 아팠다. 그게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다. 곁을 비우지 않는 아내에게, 혼기가 찬 딸에게, 밤낮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아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엄지발가락을 곧추세우고 바닥을 디뎌보려 했으나 닿지 않았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스스로 모래 늪의 저 검은 입 속으로 욱여넣어 버리고 싶었다. 삶과 삶이 아닌 것의 경계가 면도날처럼 얇디얇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피고인들은 피해자들의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지난 7일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수백억원대의 전세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된 속칭 '건축왕' 남모씨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같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부동산 공인중개사 등 9명에게는 징역 4~13년이 각각 선고되고, 불구속 피고인은 모조리 법정 구속됐다. 판사는 선고공판에서 "현행법상 사기죄 최대 형량은 10년이고, 경합범 가중을 하더라도 징역 15년 이하로 정해 더 높은 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건이 불거진 이후 모래 늪의 검은 구덩이 속으로 제 몸을 던진 피해자가 4명이나 된다. 지난해 2월 말 서른아홉 살 청년은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뭔가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라는 말도 유서에 남겼다. 한 달 반 뒤 이번엔 스물여섯 살 청년이 삶을 포기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생 때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청년은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2만원만 보내달라"고 했단다. 다시 사흘 뒤, 전날까지도 회사에 출근했던 여자육상 전 국가대표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떴다.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 내놓은 쓰레기봉투엔 수도요금 체납을 알리는 노란색 독촉장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5월 하순 뒤늦게 자신이 전세사기 피해자인 사실을 알게 된 40대가 길거리에 주차된 차 안에서 외로이 삶을 끝냈다.

 

희생의 행렬은 여기까지일까. 지난해 6월 전세사기특별법 시행 이후 지자체에 접수된 피해사례 중 전세사기 인정 건수만 1만1천 건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아파트, 오피스텔, 다세대주택을 대상으로 4만여 건의 임의경매 절차가 시작됐다. 그 전해보다 62%나 늘어난 수치다. 앞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4명 중 1명이 극심한 우울과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다. 면도날 위에 서 있는 우리 이웃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10년 전 나쁜 기억을 굳이 소환하는 까닭은 직접 겪어보니 정말 아프더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위험한 경계에서 발가락 끝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국민과 주민을 붙잡기 위해 국가와 지자체가 내미는 손이 아직도 너무 멀리 있다.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이충환 서울대 객원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