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상처받고 눈치보던 시간
각자의 고단함과 상황에 대한 이해
부정적 감정을 막는 최소한의 장치
한 사람만 피해자 되는 관계란 없어
'나' 중심 사고 경계하며 살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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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
한동안 가여웠던 '어린 명하'에 경도된 적이 있다. 부모의 과잉 교육열, 그 안에서 상처받았던 순간과 그 상처가 이어져 만든 성격의 불편한 지점, 혹은 고부간의 갈등을 지켜보며 손녀나 딸보다는 며느리와 아내의 감정으로 할머니와 아빠를 대했던 시간. 그 속에서 주눅들고 눈치보던, 온전한 딸과 손녀로 살지 못한 '명하'들이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땐 심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읽고 들은 대로, 더 이상 무력하지 않기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어른 명하'가 '어린 명하'를 괜찮다고 위로하거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기도 했다.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로부터 뒤틀린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볼 순 있었다.

"네 주변 사람에게도 어렵고 상처받은 시간이 있었어. 그 시간을 겪은 그이들도 자신의 삶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너를 키워낸 거야." 내면 여행을 인도한 선배는 매번 이 말을 강조했다. '나'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부모, 형제 등 주변 인물을 납작한 풍경으로 만들고 자기 삶의 역사를 온통 피해자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한 말이었다. 서른 초반, 3년을 함께 읽고 대화 나누며 심리학을 공부한 그녀들과의 대화에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고단했던 이십대, 아빠의 폭력 앞에서 방관자이기만 했던 엄마를 향한 분노, 아들이 아닌 딸로 살아가며 느낀 열패감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었다. 그 시절의 '나'들은 가여웠으나 생계가 어려웠던 가족 모두에게는 각자의 고단함이 있었다는 것, 폭력을 막아낼 수 없었던 엄마의 고통 또한 내 고통만큼 무거웠다는 것, 가족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던 아들의 열패감 또한 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선배를 통해 우린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는 내게 상처를 준 가족이지만 그들에게도 다양한 상황적 맥락과 그에 따른 고통이 있었다는 점에서 가족에 대한 일방적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막는 최소한의 장치가 되었다.

'나'는 심리학에 의해 발명된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엔 관계로부터 독립된 '나'를 사유할 수 없었다. 감정의 희로애락은 관계와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었기에 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인과의 결과일 뿐, '나'를 중심에 놓고 가해와 피해의 관점으로 해석되진 않았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상담실에 들어서면 대부분 관계의 피해자가 된다. 거시적, 혹은 미시적인 당시의 문화·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의 관계 맥락은 대부분 제거된 채 상처받은 '나'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주관성과 자기표현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주요 발상으로 이 관점에서는 세계가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니키다 돗포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관계의 배제가 타인을 복잡한 맥락을 지닌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 한 개인의 비극이나 희극을 부각시키기 위한 단순한 '풍경'으로 전락시킨다고 말한다.

"내 삶에 나는 없었어. 이젠 나를 위해 살 거야.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이젠 몰라." 명절을 보내고 온 그이의 말에 한참을 생각했다. 듣는 동안 공감은 했으나 어쩐지 동의할 수는 없었다. 관계는 한 사람이 온전히 피해자가 될 만큼 그렇게 얄팍할 순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가해와 피해로 적대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이름뿐이고 사실은 서로가 교차되면서 혼선을 빚는다. 최근 받은 상담에서 그이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를 그렸고 상담사는 이것을 '나'는 없고 '나'가 책임져야 할 무게와 책임으로 해석했다. 고진은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구조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그동안의 역사는 필연적이고 선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심리학이 난무한 시대가 어쩌면 우리 모두를 주변의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그래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대신 내 상처에만 집중하는 '내적인간'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적인간'이 되어 '나'에게 경도될수록 결국 우린 서로에게 서로 납작한 풍경이 될 수 밖에 없는데도.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