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화당 신맹순 후보
충남 서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난 신 후보는 62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오성, 명덕, 청룡, 청파 등 충남 보령 일대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71년 '중등학교 준교사 고시검정'을 통해 중등교원 자격을 따고 72년 동인천고에 지리교사로 부임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신흥중, 제물포고 등에서 근무하다 89년 5월 전교조 인천지부 준비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구속교사 1호'로 기록되는 등 옥고를 치른 그는 91년 6월 지방의회 의원선거에서 인천지역 재야·시민단체가 추천한 야권단일후보로 나서며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800여표차로 낙선한 뒤 계양산 살리기 인천시민대책위 연구분과위원장과 인천지하철1호선 인천시민대책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시민운동 진영에 몸담게 된다. 95년 2대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남동 제2선거구에 출마,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된 그는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기에 이른다. 98년 3대 시의원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백지화 등 각종 지역현안 해결에 발벗고 나서게 된다. '발로 뛰는 성실한 시의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최근 YMCA에서 인천시의원 29명을 대상으로 한 의정활동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올해 초 민주당 지구당 조직책 선정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탈당한 뒤 지난달 새롭게 창당한 녹색평화당의 시장후보로 추대됐다.

▲민주노동당 김창한 후보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에서 고등학교까지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 항상 친구들이 많았던 그는 중학교 역사시간에 들었던 김주열 열사의 이야기와 4·19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며 생활했다고 한다. 80년 동국대에 입학하면서 대학에서 민주화의 봄을 맞게 되었고 반독재민주투쟁 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두차례 옥고를 치르며 노동·민중운동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된 그는 84년 초 출감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와 공장노동자로 생활을 시작한다. 위장취업으로 해고와 구속을 반복하면서도 '잘못된 사회를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바꿔야 한다'는 신념아래 노동조합 결성과 노조 민주화 활동을 계속했다. 86년부터는 지역의 노동운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상담소 등을 운영하면서 지역 노동운동계의 주축으로 부상하게 된다.

90년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인 전노협이 결성되면서 80년대 중반부터 생각해왔던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건설에 투신하게 된다. 한국노동당, 민중당, 진보정당추진위원회, 국민승리 21, 민주노동당의 인천지역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18평 아파트의 전세금 4천만원이 사실상 재산의 전부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 매진하면서도 부평시장에서 틈틈이 해산물 장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왔다.

▲사회당 김영규 후보
경북 금릉군에서 8남매의 6번째로 태어난 김 후보는 53년 휴전후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그 해 4월 터진 한일회담반대집회에 참가했고 6·8 부정선거 반대투쟁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수배와 수배해제를 반복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는 그는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려면 먼저 실물경제를 알아야 한다고 판단, 한국은행에 취업하게 된다.

이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85년 미국남가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인하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천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노동자 운동의 효시인 인천에서 노동자·민중운동에 기여하고 싶었다'는 그는 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인천지역본부 공동대표를 맡은 이래 지난해 '대우자동차 해외매각반대와 완전고용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장'까지 각종 지역현안에 뛰어들며 '인천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

지난해 인하대교수협의회장을 역임하던 중 총장중간평가제 도입과 대외활동 참가 등을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된 상태지만 대학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해 복직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월 사회당에 입당한 후 인천시장후보로 선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