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는데' 책 가져왔다는 딸
놀랍고 감동… 그래서 후끈해졌다
몰래 본 일기장엔 예쁜 말만 가득
절반은 MBTI 이야기… 혼자 '푸실'
'들키면 어쩌나'… 어이없는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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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내 딸은 이제 만 여덟 살,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직 익숙한 나이로는 열 살이다. 예비 초등 3학년이다. 늘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럴 일이 아니다 싶었던 건 나의 열 살 무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열 살 적 나는 생각이 몹시 많았다. 청개구리 손에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자아이들이 유치했고, 걸핏하면 삐치고 울어버리는 짝꿍 아이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세계를 단숨에 건너뛴 것처럼 짐짓 골몰히 생각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유독 한 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마도 피아노 학원에 다녀오던 길이었을 텐데, 아이들로 빼곡한 놀이터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던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며 가만히 생각을 했더랬다.

"엄만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해. 열 살이었거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누굴까? 나는 대체 누굴까?" 내 말에 딸아이가 대답했다. "엄만 김서령이지." "그런 거 말고 그냥… 나란 사람은 누구지? 나는 왜 김서령이지? 왜 신욱이가 아니고 영애가 아니고 지현이가 아니고 하필 김서령으로 태어났지? 나는 어디서 온 걸까? 어쩌다가 김서령으로 살게 되었을까? 나는 앞으로 어디로 계속 걸어가게 될까? 나중엔, 아주 나중엔 어디로 갈까? 그런 생각.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직 또렷하게 기억나." 말을 하면서도 웃었다. 고작 열 살 먹은 그 시절의 내가 조금 우스웠다. 공기놀이를 하자고, 땅따먹기를 하자고 친구들이 나를 불렀지만 미간 한 번 살짝 찌푸리고는 대답 없이 걸어갔던 나. 도대체 얼마나 새침데기였던 걸까. 내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가 한참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내가 물었다. "이상해? 그런 생각?" 아이가 대답했다. "엄마, 요스타케 신스케가 쓴 '이게 정말 나일까?'란 책이 있어. 그거 말고도 '이게 정말 마음일까?'랑 '이게 정말 천국일까?'라는 책도 있는데, 일단 엄마는 '이게 정말 나일까?'를 읽어 봐. 엄마가 궁금해한 것들, 그 책에 다 있어. 엄마가 그 문제를 더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책을 굳이 찾아 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내 열 살 적 질문을 제대로 이해해서 그 책을 추천한 것인지 나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직 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딸아이가 상대의 마음을 듣고 난 다음 책을 추천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상대의 마음을 듣고 "응, 그렇구나" 반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가 그 마음을 더 오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책을 들어 조언해 주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이 몹시 새로웠다.

딸아이는 수준 높은 책을 잘 읽어내는 아이가 아니다. 아주 평범하게 제 또래 수준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에 책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후끈해졌다. 내가 밥을 짓는 사이, 세탁기를 돌리고, 직장엘 나가고, 연차를 쓰고, 가끔 순대국밥을 먹고 김밥을 먹는 사이, 아이는 저 알아 잘 자라고 있었구나. 제 방 책꽂이의 책을 뽑아 읽고, 학급문고와 도서관의 책을 골라 읽던 그 순간순간, 아이는 쉼 없이 자라고 있었구나.

아이가 학원에 간 사이, 나는 치사하게도 아이의 일기장을 몰래 읽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의 일기장엔 서툴지만 바르고 예쁜 말만 가득했는데, 이제 열 살 아이의 일기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절반은 MBTI 이야기인 데다 온갖 유행어와 은어들로 가득했다. 집에 돌아오면 혼내줄까? 약 2분간 고민했지만 나는 혼자 푸실푸실 웃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걸. 이건 아이가 걸어가는 계단 한 귀퉁이일 뿐인걸. 게다가 일기장을 몰래 본 엄마라는 걸 들킨다면 당분간 그 토라진 얼굴을 어찌 견디려고. "와, 어이없어.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사춘기 오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채로 딸아이의 일기장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