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정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태종은 양주 검암산 기슭 능 조성
왕릉 중 가장 크고 단순한 구조지만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를 품은 곳
혼자있는 당신 우리가 위로할 시간

건원릉
조선 왕릉 42기중 가장 규모가 크며 봉분이 억새로 이루어진 태조 건원릉.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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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갑자기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멈춘다. 기암괴석으로 우뚝 선 인왕산 선바위는 마치 장삼을 입은 선승의 모습이다. 세 사람이 걷고 있다. 침묵 속에 세 사람은 서로 얼굴만 보고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숙명의 시간이다. 한양도성 경계를 결정짓는 순간, 한 사람은 떠나야 한다. 600여 년 전 도성의 경계는 눈발이 날리는 인왕산에서 결정되었다. 무학대사는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기를 바라지만, 정도전은 도성 밖에 두고 싶었다. 운명을 가르는 결정은 이성계가 내려야 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지를 잡고 세 사람은 삼각산에 닿았다. 삼각산 백운대에서 백악산과 인왕산 중 주산을 찾는다. 주산을 정한 후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법궁인 경복궁도 짓는다. 그런데 한양도성 경계가 문제다. 태조 이성계는 자연의 힘으로 결정한다. 다음날 눈이 녹는 곳으로 경계를 삼았다. 최악을 막는 차선책이다. 그렇게 선바위는 도성 밖으로 밀려나고, 무학대사는 한양에서 점점 멀어졌다. 경복궁 설계도 정도전에게 맡겨졌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도전은 재상의 나라를 꿈꾸며 세자도 신덕왕후 아들인 방석으로 세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도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신덕왕후 죽음은 태조 이성계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태조는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신덕왕후 능을 만들고 싶었다. 도성 안 정릉이 있는 곳에 원찰 흥천사도 만들었다. 태조는 매일 경복궁에서 능과 절을 다녀온 후 범종 소리에 잠들었다. 이곳이 도성 안 정동이다.

하지만 이방원에게 신덕왕후 정릉(貞陵)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은 눈엣가시였다. 어머니 신의왕후 제릉(齊陵)은 개경 안에 추존된 능이라 더욱 가슴 아려했다. 1차 왕자의 난에 이복동생 방번과 세자 방석을 아버지 태조가 보는 앞에서 죽인다. 과연 이성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절대권력, 형제간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 속 인생무상을 느꼈다. 2차 왕자의 난에 또다시 태상왕으로 권좌에서 내려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함흥으로 간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태조 이성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태종 이방원은 수많은 정적과 친인척을 살해하며 조선 최초의 세자까지 폐위 후 죽인다. 심지어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도 폐위해 버렸다. 아버지 이성계와 진정한 화해도 없이 왕권 강화를 주창하며 역사는 흘러갔다. 태조는 상왕에서 태상왕이 된 후 1408년 창덕궁 광연루에서 세상을 떠난다. 인간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그리며, 막내 방석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려 도성 안 정릉에 묻히길 원했다.

그러나 태종은 아버지 유언을 따르지 않고, 양주 검암산 기슭에 능을 조성하였다. 산릉도감을 만들고, 6천명을 동원하여 100여 일 만에 왕릉을 만든다. 조선 최초 왕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 현릉 양식으로 만들었다. 병풍석에 십이지신상을 넣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성계, 고향 땅 함흥에 핀 억새와 흙을 봉분에 덮었다. 건원릉은 조선 왕릉 42기 중 가장 크다. 왕릉은 단순한 구조지만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동구릉 중 건원릉은 정자각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봉분 위 청완(靑薍)이라 불리는 억새만이 바람에 나부낀다. 혼자 있는 당신을 우리가 위로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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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중 가장 먼저 조성된 건원릉 안 태조 신도비.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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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 흥례문 앞.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제공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