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
조현병 앓는 엄마와 무너진 일상
돌봄의 역할 개인·가족에게 전가
'억압하지 않는 의존' 떠올려야
혼자 감당하지 않는 사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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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원인진 작, 최치언 연출, 2월23일~3월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상처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라고 말하던 사라가 "엄마는 이상한 게 아니야. 아픈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사람이 물건처럼 구겨질 수 있다는 걸 목격하면서부터 상처가 시작된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이송하는 장면에서다. "구겨질 수 있구나. 물건처럼."

일상이 무너지는 날이 있다. 그날 이후 사라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친숙했던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공포의 감정이 싹튼다.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 익숙했던 삶의 시간이 무너지게 된다. 너무 느리거나 지나치게 빨라진 시간의 리듬에 몸이 따라갈 수 없다. 익숙했던 생활의 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학교나 집이 이제는 안전을 보장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는 적들이 출현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평온했던 일상에 난입하여 나의 세계를 파괴한다.

준비 없이 닥친다. 각본이 없어 연습할 수도 없다. 사라에게 찾아온 난입은 집에서부터 일어난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가까운 존재로부터 찾아오는 낯섦에서 공포의 감정은 극대화한다. 괴물로 바뀐 아빠의 모습에서, 그리고 엄마의 행동을 곁눈질하며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충격과 혼란을 느낀다. 집 밖에서는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너네 엄마 집 밖으로 못 나오게 해." 사라가 연필을 집어 친구를 찍으며 한 말은 "악마 같은 새끼"다.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에 대해 이웃과 사회가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결과이다.

돌봄의 최전선으로 개인과 가족이 내몰려 있다. 공적 영역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각자 해결해야 하는 사회 구조에서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환자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으며 배제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리고 환자를 둔 가족이 돌봄의 한계에 부딪혀 일상의 삶이 사라진 채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에 갇혀 있어도 사회가 나서지 않는다면 사라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가족의 정체성은 과거의 시간에 묶어두면서 돌봄의 사회적 역할을 개인에게 전가해서는 이상한 나라에서 사라를 구할 수 없다.

연극에서 가족의 이야기가 많은 까닭은 무대가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크기와 깊은 연관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사회를 담은 그릇이라고 여겨서다. 연극은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기에 매우 취약한 형식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소설이 잘한다. 그렇다고 대규모 사건을 다루기에도 취약하다. 그건 스펙터클영화가 잘한다. 연극의 무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기에 그 규모가 적절하다. 그런 이유로 가족 서사가 주로 다뤄진다.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적절하고 무엇보다 가족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이야기를 비판할 수 있다고 여겨서다. 그런 점에서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독특하다. 사라의 내면 독백을 들려주는 서사의 문법을 그대로 무대화하고 있다. 관객이 소설을 읽어주는 느낌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연극에서는 "거짓이 없는 고백은 쉼표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쉼표가 필요한 곳은 우리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억압하지 않는 의존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상력으로 쓰는 새로운 가족 각본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낡은 과거의 가족 각본이 마치 유일한 모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이곳을 나가자"라고 엄마에게 제안하는 사라가 가는 곳이 그 어디든 그곳은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길 기대한다. 그곳은 각본이 일방적으로 주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각본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길 응원한다.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의 제목에 쉼표가 있는 까닭과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일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