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 희망 중산층 인식 왜곡돼
OECD기준과 큰 괴리 상류층 열망
계층상승 기대감 좌절 잘못된 판단
가능한 삶의 기회 스스로 포기 절망
과도한 불평등 인식 부조화 극복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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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에서 '삼포세대(三抛世代)'란 기이한 말이 등장한 지도 이미 10여 년이 넘어섰다. 2011년에 경향신문은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없이 미루는 청년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만일 안정된 일자리가 연봉 5천만원을 넘어서는 대기업 정규직으로, 신혼집은 신축아파트 전세 이상으로, 결혼식 비용은 가전 빼고 7천만원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을 삼포세대로 치부한다면, 2022년 통계청 추산 가구당 중위실질소득이 3천200만원인 이 나라에서 지극히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좌절하면서 가능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이 나라는 심각하게 뒤틀린 데다가 사회적 재생산의 전망조차 불투명한 취약국가가 되었다.

청년세대를 포함하여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중산층의 모습에는 다소 왜곡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우선, OECD의 기준에 따르면 중산층은 중위소득의 75%에서 200%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4인 가구당 연실질소득이 2천400만원에서 6천400만원에 이르는 집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구분과 대중들의 인식 간에는 앞서의 삼포세대처럼 큰 괴리가 있다. 2022년 모 증권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대체로 4인가구 기준 월소득이 686만원, 월소비 427만원, 순자산 9억4천만원은 되어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실제로 각각 상위 24%, 9.4%, 11% 수준에 이르는 거의 상류층의 하한선으로 보인다. 이른바 '왜곡된 평균'이 한국인들을 우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삼포세대'를 양산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실제로 중산층이 아닌 상류계층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열패감에 젖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계층적 지위가 기대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미래의 계층상승전망이 열려 있고, 그 가능성이 밝은 경우에 사람들은 현재의 빈곤과 열패감을 감당해낼 수 있다. 가령 50~60대의 구 세대들은 저발전 농업사회에서 미분화된 계층구조의 하층민으로 살면서도 사회경제적 발전 속에서 삶의 질이 상승하고 계층적 지위가 높아지는 기대감으로 참아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계층상승이동의 물결을 타고 스스로를 성취해냈고, 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계층적 현재 지위나 계층이동의 지향점에 있어서도 크게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 즉, 사회적 하층에서 상류층 말단까지 이동할 수 없기에 현재도 미래도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연관되어 있는 점이지만, 한국의 청년층들은 그 상당수가 중산층의 자식으로서 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안정적인 부의 세습이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상황에서, 한국의 중장년층이 자식을 중산층에 과도하게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노인빈곤을 포함하여 개인적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원래 세대간의 계층이동에 있어서 중산층 부모를 둔 자식세대의 상당수가 하층으로 하강하고, 하층부모를 둔 자식세대의 일정 정도는 중산층으로 상승하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함에도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청년층들은 자신들이 현재 하층계급에 속한다고 인식해야 비로소 현실적이고도 긍정적인 전망이 생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연애와 결혼, 나아가서 출산은 애초부터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개인화된 산업사회에서 높은 출산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시사회에서 자식은 가족노동력에 포함되기도 어렵고 개인화된 신세대들에게서 부모봉양을 기대하기란 더욱 어렵다. 더구나 그들은 하층에서 상류층 경계에 이르는 계층상승을 당연시하는 인식 속에서 이를 저해하는 모든 사회적 굴레로부터 자유롭고자 생각한다. 국가 속의 개인의 부와 지위는 절대적으로 증대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생산과 성장이 필요하다. 계층인식의 왜곡에 덧붙여 부의 불평등을 과도하게 문제 삼거나 국가의 무능력을 문제삼는 방식은 이러한 부조화를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