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피폐 당대 정신사 충격
인간 존재의 본질 투시하려 열망
반공구호 범람할때 독자적 세계
외롭게 분투했던 행적 기억해야
초기작 '목숨'은 전쟁으로 인하여 인간의 소중한 생명이 하찮게 버려지는 야만적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어야 할 삶의 조건을 성찰한 시편이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인한 실의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 스스로 역사의 증언자 혹은 고발자가 되려는 자의식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의 본래 영혼을 회복하려는 긍정적 전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대표작 '오렌지'는 인간을 둘러싼 사물의 세계를 '오렌지'라는 대상으로 은유한 시편으로서, 존재의 본질을 향한 그의 일관된 추구 의지를 보여준 실례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오렌지 껍질을 벗겨 속살을 만나는 순간 오렌지는 사라지고 만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렌지는 '껍질'이나 '속살'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전체이기 때문이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대는 순간/오렌지는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라는 대목이 이를 입증하는데, 이 점을 간과하고 오렌지를 파악하면 결국 오렌지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고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와 사물이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결코 아니다. 시편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이 같은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6시집 '빈 콜라 병'(1968)으로부터 그는 존재 탐구의 시학으로 옮겨간다. 그는 대상에 몰입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상호 모순의 운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지향은 스스로 말한 "시는 귀향이며 동시에 탈향"(나의 빵세, 나의 시론)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은 이러한 상상력의 질서 속에서 신동집의 일관된 주제인 존재론적 사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넘어진 빈 콜라 병은/빈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에서처럼 '빈 콜라 병'이라는 사물을 통해 '빈 자기'의 각성을 형상화하려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동양적 사유와 서구적 감각의 명민함을 상호 조율하면서 존재의 근원적 인식 체계를 수용하려는 그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유에는 노장적 상상력과 현상학적 인식이 동시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동집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나 실존의 조건들을 응시하면서, 그것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까지 투시하려는 열망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의 시는 투명한 시어를 통해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본원적 휴머니티를 강조하면서, 인간 존재가 처한 여러 운명적 조건을 승인하고 탐색하는 세계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현실적 차원에서 쓰이지 않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발원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상태의 증언과 반공 구호의 요란한 복창이 범람하던 시대에 그는 이러한 독자적 시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한국 시의 내재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러한 세계가 전혀 부재하던 시대에 한국 시의 현대성을 위해 외롭게 분투했던 한 시인의 행적과 그 미학적 결실을 온전히 기억하고자 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