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총선 채 한달도 남지 않았다
정책선거 종적 감춘채 공중전만
선거때만 등장했다 시간 지난후
슬며시 사라지는 空約 부지기수
'떴다방식 후보' 발 못 붙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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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
신표(信標)는 테세우스 신화에 나오는 약속에 관한 이야기다. 테세우스는 아버지가 급히 떠나며 섬돌 밑에 남겨둔 '외짝 신과 칼, 칼집'을 잊지 않은 덕분에 계모의 계략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타고 돌아오는 배에 백기(신표)가 걸려 있지 않은 걸 본 뒤 자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신표는 약속이다. 약속은 사람의 생과 사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

중국 고사에는 과시(瓜時)라는 말이 있다. 얼핏 과시(誇示)와 헷갈릴 듯하다. 과시(誇示)는 사실보다 크게 나타내어 보이다, 즉 과신하여 우쭐댄다는 뜻이다. 반면 과시(瓜時)는 '오이가 익을 무렵'이란 뜻이다. 관련된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통치자 양공은 사생활이 대단히 문란했다. 배다른 여동생과 사통하는가 하면 약속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부 연칭과 관지보에게 군대를 이끌고 규구라는 먼 지방에 주둔케 한 뒤 다음 해 '오이가 익을 때' 다른 사람과 교대시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앙심을 품은 연칭과 관지보가, 역시 양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공손무지와 안팎으로 결탁해 반란을 일으켜 양공을 내쫓는다.(김영수 저, '일일일구一日一句'에서)

과시(瓜時)는 구체적으로 기한을 정한 약속을 의미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양공의 최후와 아들 테세우스가 잊어버린 신표 탓에 스스로 에게해(아이게우스가 빠져 죽은 바다)에 몸을 던진 아이게우스의 최후가 겹친다. 신표와 과시는 모두 약속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며, 동시에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 당할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한 경고이다.

22대 총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공천 과정에서의 온갖 파열음을 뒤로 하고 선거구마다 출진 후보들이 당선을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번 선거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지만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이 보인다. 우선, 거대 양당의 대결 구도가 고착된 가운데 신당들의 선전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둘째, 두드러진 정치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셋째, 각 선거구의 지역 이슈 혹은 가치 의제(밸류 어젠다)가 보이지 않는다. 선거 초반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공중전 위력이 거세고, 정책선거는 종적을 감추었다.

후보들은 지역구에 맞춤한 공약(公約) 계발에 여념이 없다. 저마다 유권자의 요구와 지역의 현안을 찾아냈다고는 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다. 지역구 후보들의 공약이 천차만별인 것 또한 생뚱맞다. 같은 지역의 현안이 다를 리 없고 유권자의 요구 역시 마친가지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후보들은 제각각의 공약을 내세운다. 우선순위의 문제이고 차별성을 부각하는 거라곤 하지만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문제는 지역구에 대한 이해와 연구 부족에서 나온 엉뚱한 공약이거나 유권자를 현혹하는 포퓰리즘일 경우다. 각 후보가 내세우는 공약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이유다. 선거 때만 되면 등장했다가 지나고 나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공약이 부지기수다. 되지도 않는 약속,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제대로 살펴야 한다. 공약(公約)이 공허하고 헛된 약속, 즉 공약(空約)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감해야 할 원고가 늘 밀려 있다. 지키지 못할 것 같던 마감도 똥줄이 타면 결국 지키게 된다. 이른바 '똥줄론'(문요한의 '굿바이 게으름'에서)이다. 매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글쟁이로서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럼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한물간 글쟁이로 전락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은 당연히 퇴출 대상이다.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떴다방' 정치인은 더 이상 정치권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글쟁이는 마감을 지켜야 하고 정치인은 공약을 지켜야 한다. 신표와 과시를 잊고 자신을 과신(過信)해선 안 된다.

/최준영 (사)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