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쓰면 주머니서 꺼내는 느낌
딸이 끄집어낸 그림에 기억이 새록
미화원의 기부에 담긴 인생 이야기
경이로운 삶 수신하듯 우산 돌려봐


종이에 달린 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것은 전부 글자로 되어 있다. 돌돌 말린 리본처럼 문장의 형태를 띠고 있어 그걸 풀어서 펼치는 것이 글쓰기가 된다. 그런데 여섯시가 되어 어린이자료실이 문을 닫자, 내 옆에 앉은 딸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딸의 '종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글자보다는 그림이다. 다섯 손가락을 그린 후 각각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나무 덩굴, 보석이 달린 철사, 초록색 뱀, 색실을 그린 후 손바닥에는 기하학적 패턴의 연못을 만들고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바퀴모양의 보석 그림을 보다가 내 노트로 돌아왔는데, 문장은 어느새 기억으로 바뀌어 있었다.
작가가 되기 전에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는데, 한번은 바퀴를 테마로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은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을 섭외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문을 뒤지다가 조그마한 미담을 발견했다. 재활용처리장에서 일하는 어느 환경미화원이 버려진 소파에서 나온 동전들을 수년간 모아 전액 기부했다는 기사였다. 신문에 나온 곳으로 전화해 연결이 되어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그 코너는 글보다 사진이 중요했고, 인터뷰는 몇 줄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셨어요?"라는 첫 질문에 그의 삶 전부가 흘러나왔다.
우선 그는 농부였다. 남쪽에서 농사를 짓다가 작황이 좋지 않아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다. 물고기들을 따라 고성까지 올라갔고, 배가 풍랑을 만나 북한으로 떠밀려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 온갖 조사를 받다 귀화한 것이 아니라는 판명이 나서 겨우 남한으로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서슬퍼런 안기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즉시 남산으로 끌려가 북한 공작원이 된 것은 아니냐는 혹독한 취조를 몇 달이나 받았다. 결과적으로 가족도 일자리도 다 끊어져버렸다. 술에도 빠지고 폐인이 되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시작한 일이 환경미화원이다. 재활용처리장에서 가구나 소파를 해체하다보면 끼어있던 동전 같은 것이 나오는데 모으다보니 오십만원이 넘었다. 그런데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피해만 받았지 좋은 일은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기부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컨테이너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렸다. 그는 내게 우산을 건네주었다. 받아도 되느냐고 머뭇거리자 "쓰레기장에서 나온 거라서 그래요? 이래봬도 멀쩡해요"라며 우산을 쫙 펴서 하자 없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감사히 받아 인사를 하고 거대한 재활용 쓰레기장을,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강력한 냄새와 스펙터클한 풍경을 통과하며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우산은 튼튼하고 멀쩡했으며 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벅차 꼭지를 빙빙 돌렸다. 농부와 어부를 거쳐 전국 팔도를 유랑하다 소파 틈새의 동전을 꺼내 유리병에 담아 고아원에 기부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 우산살만큼이나 사방에서 뭔가를 수신해 오고 있었다. 이 우산-안테나를 빙빙 돌리며 내가 또 수신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거대하고 경이롭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내 종이 주머니에는 고스란히 들어있었고, 운 좋은 오후에 꺼낼 수 있었다. 이런 일은 드물게 벌어지는 축복 같아 쓰는 고통을 잊게 해준다. 백지는 대체로 공포를 자아내는 사막이지만, 이따금 보이지 않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꺼낸 것은 글자가 아니라 기억, 딸이 꺼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상상이었던 것 같다. 글이건 그림이건 보석임이 틀림없는.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