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직장 생활때 생전 처음 '조깅'
쉽지 않을땐 브리즈번강 거닐기도
지금 나의 시간 많다 느껴지지 않아
유쾌한 할머니 되고 싶을때가 많다
그 인생도 꽤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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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젊은 날, 호주에서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브리즈번이라는 도시는 사계절 내내 맑았고, 한겨울에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샌들을 신으면 발은 좀 시려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는 아닐 만큼 따스한 곳이었다. 회사는 브리즈번 시티 가장 번화가 한복판에 있었고 내가 살던 집 역시 회사에서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십여 분쯤만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출근은 아침 아홉 시, 퇴근은 오후 다섯 시 반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으므로 당연히 나에게는 시간이 혹독할 만큼 많았다. 집에 가는 길에는 대형 마트에 들러 마감 세일을 하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고, 보틀숍에 들러 맥주도 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어도 일곱 시가 채 되지 않았고, 온종일 영어만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그걸 애써 듣느라 금세 피곤해졌다. 그때 내 소원은 설거지를 하며 뉴스를 듣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설거지 물소리에 섞여 대충대충 들리는 뉴스도 단박에 알아먹을 수 있는 것. 그 꿈은 여태 이루질 못했다. 영어란 나에게 거대한 산 같은 것이었다. 뉴스는커녕 심슨 만화영화만 틀어놓아도 나는 금방 졸렸다. 소파에서 끄덕끄덕 졸다 결국 침대에 눕는 시간은 아홉 시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침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잠을 깨면 새벽 네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맙소사, 새벽 다섯 시에 이토록 강렬한 햇살이라니. 더 자고 싶어도 얇은 흰 커튼 사이로 햇빛은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왔고,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다시 자야 하나 고민을 하다 나는 별수 없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면 또 할 일이 없어 나는 점심 도시락을 쌌다. 식빵을 구워 슬라이스 햄과 치즈를 끼워넣는 것이 전부인 도시락은 십 분이면 완성했고, 급기야 나는 아침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함께 쓰던 플랫메이트는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간호대학을 다니던 그녀의 이름을 이제는 잊었다. "킴, 잘 잤니? 나 오늘 네 김치 조금만 먹어도 될까?" 묻던 친구였다. 과민성대장염을 앓던 그녀는 약보다 한국 김치가 훨씬 효과가 좋다며 종종 내 김치를 덜어갔다. 그래보았자 서너 점? 그러면서 2달러 동전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10달러면 한국인 마켓에서 김치 한 통을 살 수 있는데. 나는 2달러 동전을 지갑에서 꺼내는 그녀를 보며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나 이제 아침마다 조깅할 거야." 내 말에 피식 웃던 그녀의 얼굴은 여태 기억이 난다. 그녀는 간호사가 되었겠지? 1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이름을 잊다니. 생전 해보지 않았던 조깅이 처음부터 쉬울 리가 없어서 나는 뛰다 걷다 하며 브리즈번 강을 거닐었다. 출퇴근용 페리가 지나가고 이른 출근을 하던 사람들은 강변 카페에 앉아 베이글을 씹으며 신문을 보았다. 정장 수트 차림에 커다란 백팩을 메고 운동화 차림이었던 사람들. 식빵에 무른 아보카도를 버터처럼 발라먹는 사람들이 그때는 참 낯설고 신기했는데.

내가 조깅을 한다는 소식에 한국의 친구들은 기함했다. "설마! 네가?" 친구들은 며칠 그러다 말 거라 했지만 나의 조깅은 반 년이나 계속되었다. 세상에, 할 게 없어서, 너무나 지루해서 조깅을 하다니. 나도 나에게 놀랐던 시절이었다. 가끔은 강변 카페에서 마시멜로를 두 덩이나 넣은, 다디단 멜라치노 커피를 마시고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각할 일은 없었다. 서른 살의 내 시간은 무한한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늙고 싶지도 않았던 그때.

시간이 훌쩍 지나 나는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의 피트니스에 등록했다. 무거운 걸 끌고 당기는 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난 뒤 트레드밀에서 그저 걷는다. 뛰지도 않는다.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쯤 음악도 듣지 않고 그저 걷는다. 대체로 별생각이 없지만 뭉게뭉게, 브리즈번의 강변 풍경이 떠오를 때가 많다. 정장 수트를 입고 백팩을 멘 운동화 차림의 여인들이 바삐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셨던 그 다디단 커피가 떠올라 부르르 몸서리를 칠 때도 있다. 그러면서 혼자 웃는다. 서른 살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내 시간이 무한하다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빨리 늙고는 싶다. 다정하고 유쾌한 할머니가 빨리 되고 싶을 때가 많다. 그 인생도 꽤 재미나지 않을까 싶어서.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