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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 운명이 있고 부침을 겪는다. 어떤 언어는 귀한 대접을 받고, 어떤 언어는 유행어가 되거나 사어가 되며, 어떤 언어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최근 선거 유세 과정에서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된 단어가 있다. '낙랑'이란 말이 그렇다.

낙랑(樂浪)은 역사학계의 뜨거운 쟁점이다. 전한 무제가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한사군의 하나가 낙랑인데, 이 낙랑이 한반도 안에 있었는가, 한반도 밖에 있었는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동경제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경성제대 교수 이마니시 류·와세다대 교수 쓰다 소키치 등의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이 대동강 주변에 있었고, 따라서 한반도는 식민의 역사이며, 정체된 나라였다는 식민사학 이론을 널리 유포했다.

그런가 하면 낙랑은 1930년대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문화예술의 산실이기도 했다. 끽다점(喫茶店) '낙랑파라'가 그것이다. '낙랑파라'는 이상·박태원·구본웅 등 예술인들의 아지트였고, 서양화가 길진섭의 전시회가 열리는 등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위치는 현 서울시청 맞은편 플라자 호텔 인근이었다. '낙랑파라'의 주인은 이순석 서울대 미대 교수였다. 이순석 교수는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의 막내동생으로 본래 이름은 이평래다. '낙랑파라'는 '낙랑'이란 단어에 응접실을 의미하는 영어 팔루어(parlour)의 일본식 축약 표현인 '파라'를 결합시켜 만든 신조어다.

낙랑이 다시 전면에 부상한 것은 해방 직후였다. '낙랑클럽'이 그렇다. '낙랑클럽'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김활란 총장과 시인 모윤숙이 만든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우리는 점령군이다, 우리의 명령을 따르라'는 요지의 '맥아더 포고문'에서 보듯 미군은 은인이면서도 두려운 존재였고, 당연히 미군의 일거수일투족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낙랑클럽'은 미군정청 소속 미군 장교들과 교분을 쌓고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 채널이었다.

'낙랑'이 22대 총선 과정에서 다시 뜨거운 쟁점으로 불거졌다. 이처럼 언어도 운명이 있고 유전(流轉)하며 부침을 겪는다. '낙랑'이 이런 역사적 상흔을 다 떨쳐내고 '즐거움이 넘실댄다'는 본래의 어의대로 사용되는 시대가 오길 바랄 따름이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