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추시대의 패권을 다투던 제나라 환공이 고죽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던 중 길을 잃자 관중이 늙은 말을 풀어놓았다. 전군이 뒤를 따르니 이윽고 큰 길을 찾았다. 늙은 말의 지혜, 노마지지(老馬之智) 고사의 유래다. 군대가 길을 잃으면 말을 풀어놓듯이, 사회와 나라가 길을 잃으면 원로에게 지혜를 구한다.
로마의 원로원(senatus)은 건국 초기 왕에게 조언하던 부족 장로들의 모임에서 기원했다. 현대에선 양원제 국가의 상원이 명맥을 잇는다. 존 매케인은 자신의 지지자가 대선 경쟁자인 버락 오바마를 "아랍인"이라 비난하자 "그는 훌륭한 시민"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정치적 금도(襟度)의 본보기를 남긴 상원의원 매케인은 고인이 됐지만 미국 정치가 미로에 빠질 때마다 길잡이로 소환될 것이다.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이 지난 8일 의대생들의 수업 복귀를 호소하는 편지를 대학 홈페이지에 게시하자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이 총장은 편지에서 "긴 인생을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며 "피난지 부산 전시연합대학에 전국의 의대생들이 모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이 공부하던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나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며 "나는 그들에게 빚이 있고, 그들 몫까지 다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지금 전쟁이 터져도 다르지 않을 테다. 피난지에 전시연합대학을 세워 교수들은 강의하고 학생들은 공부할 테고, 그래야만 한다. 올해 92세인 이 총장은 의업(醫業) 외길에 매진해 온 원로다. 가천대와 가천대의대는 환자를 위해 청진기를 가슴으로 데우던 의사 이길여의 초심이 평생 무르익어 솟아난 '가천(嘉泉)', 아름다운 샘이다. 의대생을 향해 "강의실로 돌아오라"는 원로 의사 이 총장의 호소가 묵직한 이유는 일가를 이룬 인생의 무게 때문이다.
이 총장의 호소에도 의대생들은 수업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집단 유급 사태가 목전이다. 의사단체들이 이 총장의 호소에 동참해야 한다. 정부와 전쟁을 해도 의대생들은 강의실로 보내야 어른이고 의사답다. 원로의 조언을 가볍게 여기면 업계의 권위와 대의도 무너진다.
원로의 지혜와 경륜은 분야와 범주를 초월하기에 가치가 있다. 의대정원 확대는 진보와 보수의 공동현안이다. 의·정 갈등의 폐해가 날로 심각해진다. 형세를 살피는 꼰대들의 참견을 압도하는 각계각층 참 원로들의 고견과 조언이 절실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