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료계·대학, 각각 다른 셈 갈등 지속
밥그릇 타령만 한다고 치부한다면 더 대립
'응급실 뺑뺑이' 등 피해 고스란히 국민 몫
정치, 상대방 입장서… 의료, 기득권 양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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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철 (사)인천연수원로모임 명예회장·객원논설위원
의과대학 정원 2천명 확대 발표로 불거진 정부와 의사단체 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이슈에 밀리고 해결될 줄 기대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확산하고 있다. 서로 주장이 팽팽해 합의도, 조정도, 중재도 이뤄지지 않는 형국이다. 결론은 정부와 의료계, 대학이 각각 다른 셈을 하기 때문이다. 산은 하나인데 접근하는 길이 각각 다르다.

의정(醫政)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지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라는 것이 지혜의 요체이고 갈등 해결의 열쇠다. 이번 문제도 그렇다. 의사 수 부족 문제와 배치의 문제가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한쪽에서는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다른 한쪽에서는 의료비 증가나 과연 교육이 가능한가를 따지고 있다. 둘 다 맞는 소리다. 정부는 정부대로 의료계는 의료계대로 서로의 존재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공익과 사익, 경제적 이익이나 국민의 권리를 권력자들이 권위적으로 분배하는 행위다. 그러나 그 분배 방법과 절차에 있어서는 지도자의 역량, 집권 세력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외국에서는 유치원 하나를 짓는 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수십 번 이상 회의를 여는 등 주민 의견을 모아 설계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유치원 건물은 지금 그 도시는 물론 전국의 모델이 됐다고 한다. 또 140년째 보수 공사를 하는 성당도 있다. 우리에게는 가당치 않은 시간 낭비일까. 정치인은 임기 내에 무언가를 해 놓아야 일한 줄 안다. 조급증에 걸려 필요한 절차나 의견 수렴은 줄이거나 생략한다. 절대 공기(공사기간)를 맞추려면 그 선행 단계를 단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명장이나 명품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다. 명품 정책 또한 같다. 국민 건강과 복지에 관련한 정책이 공론화되지 않은 밀실에서 결정될 때 명품 정책은커녕 사회적 갈등만 초래할 뿐이다.

뜬금없는 소리이지만 동양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여백이다. 여백이 없는 동양화는 그림이 아니다. 반면 서양화는 꽉 채워야 한다. 서로 질이 다르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중요한 정책일수록 합의·조정 과정이 당연히 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민주이고 그렇게 하자고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도 정부는 충분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 모양인지 묻고 싶다.

의료단체는 말하자면 이익단체다. 조직원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 이익단체에 사회적 공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걸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의료인 2천명 증원을 국민의 뜻이라 한다. 국민 전체와 개개인의 합에는 차이가 있다. 국민의 뜻에도 민주주의 덫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두의 동의가 전제되는 게 국민의 뜻이라면 의사 또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첨예한 이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마땅히 지혜로 풀어야 한다. 현장의 의사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본질적 이유를 파악하지 않고 밥그릇 타령이나 한다고 치부하면 갈등은 더 굳어질 것이다. 우리는 슬프게도 이럴 때 앞장서 갈등을 중재할 정신적 지도자가 없다. 누구나 공감하고 따를 지혜를 갖춘 지도자 말이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의정 갈등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누구의 책임이 큰지를 판단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 피해는 죄 없는, 가난한 백성이 받는다'에는 동의한다. 전공의(인턴·레지던트)들의 병원 이탈 이후 '골든 타임'을 놓쳐 목숨을 잃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전공의 집단 이탈로 '응급실 뺑뺑이'가 증가했다는 통계치도 있다. 특히 지방 도시들은 응급의료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정 갈등이 길어질수록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죄 없는 백성이 받는다. 수도권에서도 수술 일정을 연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이보다 더한 갈등도 잘 극복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룬 민족이다. 이제부터라도 의정 갈등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 차근차근 이견을 조율하고 양보·타협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바란다. 정치는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 공익 분배의 책임을 다하고 의료계는 기득권을 양보하기 바란다.

/신원철 (사)인천연수원로모임 명예회장·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