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민주당의 앨 고어를 이기고 당선됐다. 하지만 플로리다주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놓고 큰 혼란에 빠진다. 25명의 선거인단 투표에서 무효표가 쏟아졌는데, 의도적으로 공화당에 유리하게 도안된 투표용지 탓이 분명해 보였다. 플로리다 주법원은 재개표를 결정했고, 결과가 바뀌면 고어가 전체 선거인단 수를 역전해 대통령 당선자가 바뀔 판이었다.
결국 연방대법원이 재개표 중단 결정으로 부시의 당선이 확정됐다. 미국내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반발했고, 밖에서는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고어와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수용했다. 공화계 대법관들이 다수인 연방대법원의 판단은 정파적이었지만, 미국식 민주주의의 전통과 규범에 복종한 것이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민주주의 역시 무수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규범으로 굴러가는 제도이다. 만일 지난 대선에서 패배하자 의회 점령을 선동한 트럼프가 앨 고어 처지였다면 미국은 정치적 내전으로 두 쪽이 났을지 모른다. "트럼프의 규범 파괴는 미국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대통령의 행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 탄압 등 예전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행동들이 정치인의 전술적 공구함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은 트럼프를 걸러내지 못하는 미국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기본 규범"의 회복을 촉구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했던 규범이라는데, 대중의 집단적 각성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22대 총선이 끝났다. 대통령과 여당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 심판에 승복하고, 압승한 제1야당 대표는 민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민주주의 규범 밖에 있는 인물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근본 없는 준연동형비례대표제 탓이다. 트럼프 같은 규범 파괴자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민주주의 제도의 타락이 트럼프 아류들을 복제할 수도 있다. 사람과 제도의 악순환에 빠지면 최악이다.
투표의 결과는 국민의 심판으로 존중해야 하지만, 심판의 결과가 전횡과 전제의 교체나 충돌로 고착되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내각제 개헌,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