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존재한 '보따리상의 원조' 보부상은 조선시대 왕성하게 활동했다. 봇짐장수는 보상(褓商), 등짐장수는 부상(負商)이라 불렸고 이를 합쳐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전국 5일장을 부지런히 오가며 물화를 유통한 장시(場市) 문화의 주역이었다. '동국문헌비고(1770)'는 전국 1천62곳의 장시가 개설됐다고 기록한다.
보부상의 봇짐과 등짐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촉작대(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부상의 등짐은 토기·질그릇부터 생선·콩·소금까지 움직이는 만물상이다. 반면 보상은 봇짐 안에 가볍지만 값비싼 장신구나 금·은 세공품을 넣고 다녔다.
1970년대 '현대판 보부상' 보따리상의 짐 보따리도 천지개벽한 세월만큼 변했다. 일본을 오가던 보따리상은 엄마들의 로망 코끼리표(조지루시) 전기밥솥과 소니 워크맨, 의약품을 들여왔다. 특히 게임 콘솔과 소프트웨어가 인기였다. 1990년대 들어서 국내 전자제품과 공산품의 품질이 일본을 따라잡자 더 이상 무겁게 일본 밥솥을 들여올 필요가 없어졌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등장한 한중 보따리상은 중국에서 참깨와 마늘, 콩, 고춧가루 등 주로 농산물을 실어 날랐다. 반면 한국에서 나갈 때는 마스크팩 등 화장품과 의류, 가전제품을 중국에 반입했다. 한중 보따리상은 2000년대 중후반 경제 무역의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산 공산품이 중국에 알려지는 빠른 창구가 됐고, 카페리 여객선사에는 승객의 30~50%를 차지할 만큼 단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는 동안 한중 카페리 여객 운송도 보따리상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그 사이 중국계 이커머스 플랫폼이 국내시장을 장악했다. 3년 7개월 만인 지난해 8월 막혔던 뱃길이 열렸지만 중국 내 소비심리 위축으로 보따리상 수는 크게 줄었다. 선사에서 승선권 반값 특가를 내놔도 소용이 없다. 최근에는 보따리상 비율이 10% 이하까지 떨어졌다.
설상가상 중국세관의 통관 규제도 심해졌다. 1인당 50㎏이었던 면세 한도가 5㎏으로 대폭 줄고 압수까지 당하니 빈손 보따리상은 이제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한중 합작 평택카페리의 중국 지분 쏠림도 혹시 중국 전자상거래 특송화물 운송시장을 독점하려는 의도인지 의심된다. 보따리상의 쇠락은 모바일로 사고파는 라방(라이브커머스·Live Commerce) 시대의 비애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