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분노보다 국가 우선하는 도량
조나라 인상여·염파 일화서 비롯
총선 후 또 탄핵 이야기 스멀스멀
적대정치 끝내고 통큰 협치 바라
양육강식이 지배하던 전국시대, 조나라에는 걸출한 두 인물이 있었다. 한 명은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인상여(藺相如) 재상, 다른 한 명은 전쟁영웅 염파(廉頗) 장군이다. 전국시대 최강대국은 진나라였지만 조나라 또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웃한 진나라가 조나라를 함부로 하지 못한 이유는 인상여와 염파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다. 한때는 오해와 시기, 질투로 서로를 등한시했다. 인상여는 진나라를 상대로 능숙한 외교를 펼쳐 조나라를 보존했다. 염파 또한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조나라 왕은 인상여를 최고위 관직에 등용했다. 염파는 인상여가 고작 몇 마디 말로 자신보다 높이 올랐다며 분개했다. 게다가 인상여는 나이도 아래였다. 염파는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인상여를 비방했다. 그를 만나면 창피를 주겠다고 별렀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길거리에서 염파를 만나면 수레를 돌렸다. 또 조회석상에 염파가 나오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가족과 지인들은 그를 겁먹은 강아지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인상여는 "진나라 왕과 염파 장군 중 누가 더 무서운가? 나는 진나라 왕과 면전에서 설전을 벌이고 그 신하들을 꾸짖었다. 그런 내가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내가 염파 장군과 다툼을 피한 건 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라를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염파는 크게 뉘우치고 사죄를 청했다. 인상여는 자기 잘못이라며 예를 갖췄다. 이후 두 사람은 형제의 교분을 맺었다. '목숨마저 내주는 돈독한 우정'은 작은 분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두 사람의 도량과 지혜가 빚은 고사성어다. 모든 사람이 인상여와 염파처럼 대범할 수는 없다. 더구나 각박한 정치판에서 문경지교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증오와 갈등을 땔감으로 적대감을 생산하는 여의도 정치에는 더욱 생경한 장면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 혐오와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통 큰 협치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우리 사회는 한차례 대통령 탄핵으로 몸살을 앓았다. 잠시 헌정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되새기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국제사회는 "미국과 유럽은 이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며 높게 평가했다. 대통령 탄핵과 헌정 질서 중단은 한 번으로 족하다. 4·10총선 이후 일부에서는 또 탄핵 이야기가 스멀스멀 나온다. 만일 증오와 적대를 반복하는 탄핵 정치가 일상화된다면 더 이상 정상 국가는 아니다. 포용과 관용대신 배제와 증오가 일상이 되는 정치는 불안하다. 탄핵의 일상화, 적대와 증오의 악순환은 어렵게 쌓은 돌담을 한순간 허무는 아둔한 짓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치는 극한 대립을 거듭했다. 야당은 의석수를 앞세워 밀어붙였고,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민생은 실종됐고 국민은 강 대 강 정치에 신물났다. 여당 참패로 끝난 22대 국회에서 여야 대치는 한층 격화할 전망이다. 언제까지 적대정치를 반복해야 할까. 우리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인상여나 염파처럼 통 큰 협치를 이뤄낼 수 있을까.
스웨덴은 협치를 근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됐다. 좌파와 우파는 설득과 공감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우선하는 정책을 펼친다. 경쟁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상대를 인정한다. 그들은 정치가 사회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분열과 폭력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국방과 안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여야가 따로 없다. 나토가입 당시 안데르손 총리는 "야당도 여당이 되면 국가를 이끌어갈 정당"이라며 야당 대표와 함께 나토 훈련을 참관했다. 22대 국회에서 여야가 극한 대립하면 누가 웃을까.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이 떠오른다. 전국시대 인상여와 염파가 보여준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前 국회 부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