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더 빠른 네트워크 시대
촛불 하나에 전국 타오른 탄핵
'꼬리가 몸통 흔든다' 실제적 警句
국민은 늘 옳으니 뒤집어도 '민국'

킨타와 쿤타가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자음이 같고 모음 배열만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게다가 익숙지 않은 이름이다. 뜻을 모르고 발음만 들으면 '간장공장공장장은 안공장장'보다 더 헷갈릴 수 있다. '그때는 맞고…'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세상의 가치관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정당한 일이 과거엔 부당했거나 반대로 과거 정상이던 게 지금은 이상한 경우가 많지 않나.
예컨대 살충제 DDT 경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말라리아 티푸스 등을 일으키는 모기와 곤충 구제에 사용됐다. DDT에 강력한 살충능력이 있음을 처음 발견한 스위스 화학자 파울 헤르만 뮐러는 그 공로로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기적의 농약으로 각광받았고. 하지만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2년 '침묵의 봄'을 펴내며 반전이 일어났다. DDT가 야생동물과 조류를 위협하고 인체에 암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환경보호 운동에 미국은 1972년 DDT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게 된 거다. 물론 표현을 바꾸면 DDT 대응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고 할 수도 있고.
그뿐이겠나. '잘 살아보세~'가 방방곡곡에 퍼지던 시절에는 전국이 공사판이었다. 높은 굴뚝들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굴삭기가 산허리를 벌겋게 파헤치는 장면이 경제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때는 감히 환경문제를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서울올림픽이 성황리에 끝난 후인 1991년 두산전자에서 다량의 페놀 원액이 유출되면서 비로소 환경문제에 눈을 떴다. 수질오염이란 용어와 100만분의 1을 뜻하는 단위 PPM에 익숙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신생아 정책의 반전이야말로 극적이다. 1980년대만 해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다. 이름하여 가족계획이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도 했다. 1987년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며 태아 성감별을 법으로 금지했다. 인구절벽에 다산을 장려하고 '여아선호'로 바뀐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힘들겠다.
한편 문맥 뒤집기도 있다. 글의 순서를 뒤바꾸거나 비트는 게 더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거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그렇다. 본디 뜻은 태산을 울리는 것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는데 튀어나온 것은 고작 쥐새끼 한 마리라는 거다. 요란하게 일을 벌였으나 결과가 별무신통한 경우를 빗댄 말이다. 오히려 요즘은 '서일필태산명동'이다. 쥐새끼 한 마리가 태산을 울릴 수 있는 세상이다. 과거 권위주의나 철권통치시대에는 소수의 매스미디어를 틀어쥐면 여론의 흐름을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신문의 기능이 '신속, 정확, 여론선도'였으니까. 하지만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일인미디어가 범람하는 지금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아닌가.
이미 피라미드가 아니라 네트워크 시대이다. 아무리 방송을 장악해도, 전통을 자랑하는 신문과 유대를 강화해도 소셜미디어의 쓰나미에 속수무책이다. 쥐구멍 하나에 둑이 터지고 조그만 쥐불에 온 들녘이 불타는 거다. 촛불 하나에 전국이 타오른 탄핵이 그러하지 않았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속담도 더는 탄식과 비아냥이 아니다. 실제적인 경구(警句)이다.
참,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은 게 있다. 바로 국민이다. 국민은 늘 옳으니까. 뒤집어도 민국(民國) 아닌가.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