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집단·고령층일수록 우파
노동자·영세자영업자 좌파 지지
사회구조 다양화로 정체성도 분화
국민정당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화
총선, 대선과 매우 다른 모습 보여


윤상철_-_기명칼럼필진.jpg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국회의원 총선이 끝났다. 선거결과에 따라 이후 한두달의 정국이 더 요동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혼란스럽다. 그 선택이 결과를 예측하면서 혹은 기대하면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표출하기 위한 행위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혹자는 정권심판적 선거였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적 선택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오리무중이다.

유권자는 어떤 후보자나 정당을 왜 지지할까? 후보자 개인의 특성이 지지선택의 이유일까? 범죄 경력이 많거나, 저품격의 막말을 일삼거나, 금융비리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다수 당선되고 뛰어난 학벌, 화려한 경력, 그리고 훌륭한 품성의 엘리트들도 낙선하는 양상을 보면 후보자 개인의 특성이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포퓰리즘을 앞세운 정책적 실패를 거듭했을뿐만 아니라 각종 비리로 기소되고 재판중인 당대표를 방탄하는 게 전부인 정당을 지지하는 모습이나 서투른 국가운영이나 사소한 비리가 드러났지만 국가행정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모습을 보면, 정당의 특성 또한 결정적 기준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후보자 개인이나 정당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재하거나 그 판단기준이 기형적인 도덕성과 정치성향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을까? 흔히 말하듯 국민들의 판단기준을 전적으로 바르다고 판단하는 정치인들의 가식적 발언에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국가의 파국 역시 국민 선택의 결과라는 사례들을 보면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국민들의 선택동기를 살펴보자. 정치의 기능 혹은 본질이 경제적 자원의 재분배에 있는 만큼 정치인·정당 선택은 스스로에게 더 유리한 자원분배를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가 집단이나 부유한 상층, 고위 전문직 중산층, 고령층일수록 자본주의체제의 보수적인 우파정당을 지지하고 노동자 농민 집단이나 사회적 하층, 영세 자영업자 층들은 개혁적인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40~50대 세대들이 생애경험으로 인해 좌파정당을 지지하고, 전형적인 보수지지세력인 의사집단들이 특정한 사회정책에 반발하여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반면, 비정규직 등 사회적 빈곤층들이 경제적 안정과 국가의 복지정책에 기대어 우파정당을 지지하고 특정 지역 주민들이 전통적인 관계에 의해 우파정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소수자집단·이주민 집단들에 의해 행해지던 스스로에 대한 인정 요구 등이 전통적 지지성향을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지역 주민들, 특정한 시대적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들, 사회적 인권 혹은 권리를 일시적으로 박탈당하거나 억제되는 직업집단들에 의해 경제적 재분배를 우선하여 표출되기도 한다. 또 다른 기준인 정치적 대표성은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실질적인 이익과 더 거리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의 엘리트들에 한해서 행정부나 입법부에 호선될뿐이다.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학벌 등이 흔히 그러한 기준으로 인식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오랫동안 경제적 계급균열과 그에 따른 계급정당이 이념형적인 모델이었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전형적인 계급정당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상층을 대변하는 자유주의적 보수정당과 서민과 노동자 등 하층을 대변하는 진보적 개혁정당의 정치적 경쟁 양상을 보여왔다. 이러한 정당구조는 사회구조가 다양화되고 개인화된 정체성이 분화되면서 선거승리를 위한 국민정당(캐치올 파티)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발전과 국민들의 경제적 풍요를 위하여 많은 정책으로 대응하고 많은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국민들이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보수정당은 한탄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심화된 불평등과 지연된 낙수효과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국민들이 공정과 상식을 더욱 원하고, 다양한 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주장하고, 경제적 재분배보다 정치적 대표성을 더 원하고 있다면, 총선은 단 하나만의 가장 결정적인 균열 위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대통령선거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