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추억되지않는 연인을
사랑의 힘으로 떠나보내는 영화라면
'8월의 크리스마스' 연인품고 떠나
사랑마다 기억되고 여전히 진행형
도무지 추억이 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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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동적인 영화가 몇 편쯤 있을 법하다. 수많은 명편들의 목록을 줄줄이 꺼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한두 작품의 디테일까지 선명하게 재현해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여럿 있겠지만 해외 경우로는 '카사블랑카', 우리 쪽으로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별 망설임 없이 그 사례로 든다. 1942년 작품 '카사블랑카'는 2차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옛 연인을 리스본으로 탈출시켜 떠나보내는 한 사내의 사랑을 담았다. 피아니스트 샘이 연주하는 'As time goes by(세월은 흘러가고)'가 선연하기만 하다. 1998년 개봉된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당시 영화계 최고 스타였던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인공으로 나온 작품으로서, 사진사인 정원과 주차단속원인 다림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허진호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정원은 소도시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30대 중반의 그는 불치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다림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정원의 사진관 근처에서 주차단속을 하고 있다. 다림은 차츰 정원의 일상이 되어가는데, 20대 초반의 다림은 당돌하고 생기가 넘친다. 정원은 죽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다림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녀도 친절하고 진솔한 정원에게 마음을 둔다. 하지만 정원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에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던 중 정원이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 가고 정원의 상태를 모르는 다림은 문 닫힌 '초원사진관' 앞을 몇 번이고 서성인다. 기다리다 못한 다림은 편지를 써서 사진관 닫힌 문틈에 우겨 넣는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정원은 다림의 편지와 자신이 언젠가 찍어주었던 다림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떨군다. 다림은 더 이상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정원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

어느 겨울날, 다림이 사진관을 찾아온다. 사진관은 '출장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문이 닫혀 있다. 돌아서 양손에 입김을 불어넣는 다림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떠나는 다림의 등 뒤로 사진관 진열장에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정원의 내레이션이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이 작품에 대한 무수한 영화평이 있을 것이다. 좋은 글의 경우,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과 힌트를 주기도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원의 삶에서 가장 무더웠던 8월 어느 날이 결국 '크리스마스'였다는 것, 그날은 다림이 찾아온 날이라는 것, 정원은 시한부 인생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정원은 '사진'의 속성처럼 사랑도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믿었지만, 이상하게도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추억이 되지 않은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는 고마움을 다림에게 표현한 것이다. '추억이 되지 않는 사랑'이라니?

추억은 욕망이 성취되었거나 소진된 다음에 찾아온다. 욕망이 현재형의 소용돌이라면 추억은 과거를 품은 채 가라앉은 침전물 같은 것이다. 다림을 정말 사랑했지만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순간, 이젠 사랑도 추억이 될 만도 한데, 정원은 그녀만은 추억이 되질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여전히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고 또 떠나게 되었으니 사랑은 영원한 현재형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카사블랑카'가 추억이 되지 않는 당신을 사랑의 힘으로 떠나보내는 영화라면, '8월의 크리스마스'는 추억이 되지 않는 당신을 사랑의 힘으로 품고 떠나는 영화이다. 어떤 사랑은 추억으로 남고, 어떤 사랑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도무지 추억이 되질 않는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