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儀軌)는 국가적인 의례나 행사를 정리한 백서다. 특히 정조는 왕실 활동·정책은 물론 문화·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활자와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하도록 했다. 화성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화성행궁 복원이 가능했던 것도 화성성역의궤 등 기록문화 덕분이다. 화성성역의궤는 각종 시설물 도면, 축조 기술, 자재 가격,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 이름까지 담아냈다.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됐다. 567칸의 정궁(正宮) 형태로 조선시대 지방에 건립된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다. 평상시에는 관청으로,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는 궁실로 쓰였다. 단순히 잠시 머무르는 행궁 개념이 아닌 정조의 장기적인 개혁 추진 공간이었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선통감부의 압력이 작용했다. 그해 우화관에 수원군공립소학교가 들어서고, 1911년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낙남헌은 수원군청으로, 북군영은 경찰서로 사용됐다. 급기야 1923년 일제는 화성행궁 일원을 허물고 경기도립병원을 신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9년에는 경기도립병원을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겠다는 발표가 났다. 이때 민-관의 열망과 노력으로 화성행궁 복원의 단초가 열렸다. 같은 해 10월 수원 출신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 선생 등 42명이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 창립총회를 열었고, 우여곡절 끝에 복원의 첫 삽을 떴다. 그리고 2002년 7월 봉수당(奉壽堂) 등 482칸에 이르는 1차 복원이 완료됐다.
2013년 신풍초등학교가 이전하면서 우화관 등 후속 복원사업도 속도를 냈다. 우화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글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신 화성유수부 객사(客舍)다.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 진찬연 때 70가지 음식을 준비하고, 음식예법 문서를 보관한 별주(別廚)까지 35년의 복원사업이 지난 24일 마무리됐다.
시민들은 119년 만에 드디어 화성행궁의 완전체를 볼 수 있게 됐다. 건축물 복원을 뛰어넘어 상하동락(上下同樂) 대동세상(大同世上)을 꿈꾼 정조 개혁정신의 부활을 의미한다. 올해 수원 문화유산 야행(夜行·5.31~6.1)이 여느 때보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잔치가 되리라 기대하는 이유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