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동아시아 역사 파헤치는중
남들 세속 맞춰갈때 자기 세상으로
문득 진짜란 무엇인지 생각하게돼
어떻게 사는게 진짜삶인지 묻는다
언젠가 이분께 이야기를 듣기를, 같은 고향 사람인데, 중세의 역사 인물에 관한 내력을 깊이 탐구한 역사책을 쓴 사람이 있다고 했다. 책 이름을 묻고 그 안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도 묻고 보니 관심이 갔다.
책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서울에 올라와 한참 있다가 이 두 권짜리 역사서를 샀다. 제대로 읽지는 않았다. 읽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사 잡지사에 다니는 기자로부터 다시 이분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얘기 끝에 이분 인터뷰를 한 적 있노라 했다. 이야기 끝에 이분이 지금 내 고향이기도 한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전화번호를 얻어 놓고 며칠을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뵈러 가는 길에 들러보자는 심산이었다.
약속한 날이 닥쳐 나는 괜히 만나기로 했나 했다. 쭈뼛쭈뼛 차마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약속한 집을 찾아가기는 갔다.
이분은 원룸 빌딩에 혼자 거처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이분의 처소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고독의 냄새를 질리도록 맡았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분의 '1.5 룸'의 집기들은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 주방 겸 거실의 책장에는 온갖 언어로 된 외국책들이 어지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랍어, 티베트어, 러시아어, 몽골어, 만주어, 튀르키에어…. 중국어책, 일본어책은 명함 내밀기도 어려운 판이었다.
따져보니, 우리는 불과 두 학번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온 학교가 같은 것도 알고 있었다. 강한 영남 사투리가 금세 귀에 시끄럽지 않아졌다. 우리는 역사 이야기를 하다 말고 금방 옛날 학창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버렸다. 하숙집, 자취방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는 마치 한 집 한 방에 기거하는 옛날의 학생들 같았다.
도대체 미국 유학 가서 법률학 박사에 변호사 자격증까지 땄다는, 고등사무관 시험에 유엔 '공무원' 시험까지 합격했었다는 이 사람은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까지 데려가 함께 이분의 집 어수선한 집기들을 치워드렸다. 뒤풀이로 셋이서 함께 '청양칼국수' 집에 가서 황칠 막걸리도 마셨다. 길거리에서 흥이 솟은 이분은 자기가 즐겨 듣는 샹송을 들려주겠다 하셨다.
우리는 길바닥 위에서 앙리코 마샤스의 '녹슨 총'을 들었다. 이 프랑스 가수는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가족을 잃었다. '녹슨 총'은 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노래였다.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좋아할까요'.
나는 지금 전쟁 반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나의 이야기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튼다.
이 사람은 학창시절에 운동을 했다는데, 밤이면 그는 그때 듣던 노래들을 틀어놓고 원고를 쓴다고 했다. 역사 왜곡에 맞서 한국인들의 잊혀진 진짜 동아시아 역사를 파헤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역사 연구는 그 옛날 학생운동의 연속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분은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어지간히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곳저곳에서 이런 이들을 만난다. 다른 사람들이 세월 따라 세속에 맞춰 흘러갈 때 이런 이들은 혼자 자기 세상에 남았다. 품은 이상 때문에 남들처럼 흘러가며 살 수 없다.
무리를 지어 정의와 민주를 외치는 광경들을 보며 나는 문득 삶에서 진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곤 한다. 진짜들은 혹시 저마다의 외딴 방에 숨어들 있는 게 아닐까? 이 시대에 진짜로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