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비밀기지·연극 무대처럼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
페르시아서 양탄자는 정원 의미
친구들과 돗자리 앉아 '삶을 논평'
다른 나로… 유토피아 따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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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늦게 도착한 봄이 야속하게도 이른 여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아쉬운 봄의 끝자락, 내가 펼쳤던 돗자리들을 생각한다. 돗자리만큼 점유했던 사각형의 시간들도.

호수공원 근처에 사는 나는 걸핏하면 돗자리를 끼고 나간다. 산수유와 목련에 이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꽃그늘마다 빈틈없이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러면 공원 전체가 대가족의 야외거실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가한 소란이, 캐노피처럼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차곡차곡 겹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좋아서 나도 한구석을 차지하려 한다.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는 봄과 가을의 한때를 놓치는 것은 쉽게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아쉬운 일이기에.

호수공원이 거대한 고래라면 우리 가족은 자리를 옮겨가는 따개비마냥 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돗자리를 펼친다. 김밥 네 줄, 과일 약간, 부스럭거리며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 이 정도면 아주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가방에 넣어온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풀어놓고 각자의 시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고, 남편은 음악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이만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풀밭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이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산문이다. 원래는 '다른(hetero)' '장소(topos)'가 합쳐져서 만든 합성어로 엉뚱한 데 붙은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푸코는 이를 가져다가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담아 뜻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비밀 기지, 한 곳에서 여러 장소가 겹쳐지는 연극 무대 같은 곳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는 '정원'일 것이다. 페르시아의 전통정원은 세계 전체를 상징하기 위해 하늘, 땅, 물(분수대), 식물을 넣어 설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가 정원을 가질 만큼 부자는 아니기에 페르시아 사람들은 정원의 패턴을 넣어 양탄자를 만든다. 그러니까 정원은 '축소된 세상'이고, 양탄자는 '축소된 정원'인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무릎을 쳤다. 알라딘이 왜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탔는지 이제야 알았으니까! 램프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오듯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법의 도구가 왜 하필 양탄자여야만 했는지 그 숨겨진 회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순간 내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것만큼이나 상승하고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는데, 여기가 바로 세상 전체기 때문이다.

며칠 후에는 다른 양탄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 분당 율동공원까지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 지인들을 만났다. 책이 매개가 되어 줌으로 만나는 온라인 모임인데. 오늘은 모처럼 오프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오기 전까지는 마음에 짐이 많았다. 주로 내가 바쁘다는데서 기인하는 것인데, 첩첩산중으로 쌓인 일들과 그것을 처리해야 할 날짜들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겨우 만든 송곳 같은 시간에 놀아버려도 되는 걸까? 좀 부담스러운데…'. 어느덧 나는 자신을 '의무'가 아닌 다른 시간에 내주는 것이 마음 편치 않게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건 참으로 기품이 없고 인색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의심과 질책의 목소리를 몰아내고 친구들을 만나 돗자리에 누워 있으니 과연 좋다. 역시나 김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와서 다시 돗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삶에 대한 논평'을 나누고 있으니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잠깐 열린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는 다른 내가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원래의 나였을지도 모르는 내가. '나에게는 친구와 인생이 필요해. 이런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해'라는 것을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들려온다. 쉽게 열리고 접히는 공원 돗자리의 목소리, 헤테로피아의 목소리였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