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다. 우리는 새끼돼지구이를 먹고 리오하 알타 와인을 마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소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1926)'에 레스토랑 보틴(Botin)이 등장한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지난 1725년 문을 열어 300년째 영업 중이다. 기네스북으로부터 인증서까지 받았다. 단골손님 헤밍웨이는 굉장한 PPL(간접광고)을 작품 속에 남긴 셈이다. 헤밍웨이가 영감 받던 그 공간에서 역사와 문화를 향유하는 식객은 감동할 수밖에 없겠다.
일본에는 와(和) 문화가 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면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고방식이다. 오래된 가게들 주변에 비슷한 가게를 차리기도 꺼린다. 가게 터를 잡고 오래 버티다 보니 노하우도 쌓이고 자연스럽게 장수가게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100년 이상 된 가게·기업이 2만7천여개, 무려 1천년 넘는 곳도 21개나 되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오래된 가게들이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지난 2018년부터 운영하는 제도 '백년가게·백년소공인'이다. 백년가게는 업력 30년 이상, 백년소공인은 업력 15년 이상의 지역사회 터줏대감들이다. 올 4월말 기준 전국 백년가게 1천369곳, 백년소공인 956곳이 지정되어 있다. 경기지역은 각 190곳·230곳, 인천지역은 각 47곳·40곳이다. 하지만 오래된 가게를 팔 걷어붙이고 키워도 부족할 판에 제도시행 7년차만에 길을 잃었다. 올해 정부 예산이 23억원에서 4억원으로 80% 넘게 깎인 탓에 신규 가게·업체 지정마저 올 스톱이다. 지역 소상공인을 힘 빠지게 하는 변덕스러운 정책이다.
우리나라 소상공인의 1년 차 생존율은 64.1%, 3곳 중 1곳이 몇 개월 만에 셔터를 내린다. 5년 차까지 버티는 곳은 겨우 34.3%뿐이다. 코앞에 동종업종 간판이 달리는 일이 허다한 약육강식 상권이다. 최악의 조건에서 장인정신을 대물림하는 우리 백년가게·백년소공인은 더 크게 칭찬받아 마땅하다. 서울 충무로에서 66년을 버텨온 대한극장도 올 9월 문을 닫는다. 추억과의 이별에 쿨하기는 힘들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