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내인생 다시 연습하는 기분
쫄지않고 사는법 등 힌트 배운느낌
그저 작가의 건강·가족 평안을 기도
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도 많았다


늘 가던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내 입 안에 약을 발라주며 풉 웃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검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말씀드릴 테니 과로만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화들짝 놀랐다. 협심증일까?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119에 전화를 걸 뻔했다.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또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오는 습관, 좋아요. 오래 사시겠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역시나 과로를 하지 말란다.
겁이 많아진 거다. 조부상, 조모상에 부의금을 보내던 시기를 훌쩍 지나 부모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본인상은 먼 인연이라도 온종일 우울하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인 거야? 뭔가 좀 아찔하다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퍼먹으며 훌쩍였다.
아침마다 출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나에게 그건 아침 신문을 읽는 것과 비슷한 습관이다. 또 얼마나 새로운 출판 아이디어가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이 데뷔 전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까.
그곳에서 책 한 권에 펀딩했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가 쓴 책이다. 이제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벌써 슬펐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작가는 림프종 3기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간 책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펀딩 전 웹툰으로 먼저 읽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이의 투병기에 내가 몇 번이나 눈물을 쏟은 건 작가의 말투가 너무도 담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목이 그랬구나.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다고.
출판 펀딩은 성공했고 얼마 후 집으로 책이 배송되었다. 작가가 쓴 손편지와 함께였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책에 펀딩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로 편지는 시작되었다. 그래, 우리는 정말 얼굴도 모르는 사이구나. 그런데도 이토록 가깝고 다정한 느낌이 드는 건 책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영향력일 것이다. 작가의 마음속에 어느덧 걸어 들어갔다 나온 느낌.
단숨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뭐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허술했던 내 인생을 다시 연습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투병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새롭게 걷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는 생각. 쫄지 않고 사는 법. 잦은 구내염이 암일까, 아닐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앞을 턱 가로막고 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을 대할 때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지 그것에 관한 힌트를 배운 느낌.
책 속에서 그는 치료 계획을 잡기 위해 받을 수 있는 보험료를 계산하고, 가족에게 병을 알릴 방법을 고심하고, 항암치료를 앞두고 머리를 밀기 전에도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예쁘게 자른다. 까까머리가 되는 순간에도 예쁜 머리를 하고 싶은 그 마음. 아내의 눈물에 미안하지만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마음도 솔직하다. 행여 자신이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이 책이 팔려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몹시도 덤덤했던 웹툰과는 다르게 책에서는 작가의 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 떨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작가의 건강과 그 가족의 평안을 기도했을 뿐. 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 이렇게나 많았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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