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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 50년 맞은 인천항 갑문

8년 공사끝에… 5만t급이상 대형 선박 동시 접안 가능
인천항 수출액 급증 1978년 '사상 첫 10억 달러' 돌파
올해 토목문화유산 선정… "산업발전에 역사적 의의"


"오늘 우리는 대자연에 대한 도전에서 인간 의지의 또 하나의 승리를 기록했다. 인천항 갑문은 우리 국력의 상징인 동시에 조국 근대화를 앞당기는 우렁찬 쾌거다."

1974년 5월10일 인천항 갑문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했다. 인천항 갑문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낸 것이다.

최대 10m에 달하는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동양 최대의 크기로 만들어진 현대식 인천항 갑문은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우리나라와 세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면서 국내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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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5월 10일 진행된 인천항 갑문 준공식. /인천항만공사 제공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인 공업지역의 원자재와 소비재 물동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는 약 2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인천항 갑문 공사에 착수했다.

1960년 46만6천259t이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279만8천t으로 600%나 급증했다. 당시 우리나라 1년 국가 예산이 5천억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갑문 건설을 추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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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갑문이 지어지기 전인 1966년 인천항 전경. /경인일보DB

일제강점기인 1918년 지어진 갑문이 있었지만, 최대 4천500t급 선박만 접안할 수 있었다. 큰 선박이 들어오면 작은 배를 붙여서 인천 앞바다에서 1차로 화물을 내린 뒤, 항구 근처에서 또다시 하역해야 하는 불편함이 컸다.

8년 간의 공사 끝에 1974년 5월10일 마침내 현대식 갑문이 만들어지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옛 갑문은 인천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식 갑문이 생기면서 인천항은 국내 최초 컨테이너 하역 전용 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들이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하역 능력은 기존보다 4배 많은 627만t으로 늘었고, 항상 일정한 수심을 유지하는 수면적 151만㎡ 규모 내항도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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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인천항 갑문타워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인천항만공사 제공

갑문 축조와 내항 확장으로 안정적인 하역 환경이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편찬한 '인천항사'를 보면 인천항의 수출액은 1973년 3억1천791만3천 달러에서 갑문 완성 이듬해인 1975년 5억9천941만8천달러로 크게 늘었다. 197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대한토목학회는 이런 가치를 인정해 지난 3월 올해 대한민국 토목문화유산으로 인천항 갑문을 선정하기도 했다. 대한토목학회는 "인천항 갑문은 해외의 우수기술을 벤치마킹해 건설된 국가 기반 시설로 세계 6번째로 건설된 갑문"이라며 "아시아 최대 규모 토목사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준공 당시 5만t급 대형선박의 통행이 가능한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갑문"이라며 "토목공사 측면에서도 인력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크레인·굴삭기·착암기 등 현대적인 장비가 대량 동원돼 항만의 기계화 시공을 알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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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이철조 인천지방해양수산청장, 이경규 인천항만공사 사장 등 행사 참석자들이 갑문 50주년 기념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

인천항만공사와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지난 50년 동안 항만도시 인천의 중요 인프라 역할을 해온 갑문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10일 갑문 일대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준공 50주년 기념 조형물 제막식과 함께 갑문 근무 퇴직자 20여명에 대한 감사패 전달식이 진행됐다.

인천항만공사 이경규 사장은 축사를 통해 "50년 전 인천항 갑문이 준공된 것은 우리나라 경제 역사에 큰 변곡점 중 하나였다"며 "갑문 개통 이후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산업발전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근대화·산업화에 있어 갑문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인천항 갑문이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끼친 역사적 의의가 국민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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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공부터 함께한' 오세훈 前 인천항 갑문관리소장 "예전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현역 남길"

꽃·나무 심었는데 훌륭한 공원 자리잡아
하루 50척 넘게 통과 항상 긴장하며 일해


"젊은 시절을 보낸 인천항에서 갑문 준공 50주년을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지난 10일 인천 중구 갑문에서 열린 갑문 준공 5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오세훈(84·사진) 전 인천항 갑문관리소장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 전 소장은 1974년부터 2004년까지 갑문에서 근무했다. 갑문이 운영을 시작한 순간부터 함께해 온 셈이다. 그는 "갑문은 50년 전과 크게 변한 것은 없다"며 "예전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동안 인천항 주요 인프라로 고생해 준 갑문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갑문 운영 초창기부터 근무해온 탓에 갑문 시설물 대부분에는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현재 야외 결혼식 등이 열리는 갑문 주변에 조성된 공원도 그가 만들었다고 한다.

오 전 소장은 "갑문은 바다를 매립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주변 경관이 좋지 않았다"며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에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시간이 지나 훌륭한 공원이 된 것을 보니 정말 뿌듯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오 전 소장은 1992년부터 2004년까지 갑문관리소장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는 인천항 갑문에 선박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때다. 물동량이 늘면서 하루에 50척이 넘는 선박이 갑문을 통과했다고 오 전 소장은 설명했다.

그는 "인천항에 입출항하는 선박이 항상 갑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긴장하면서 일했다"며 "몸은 힘들었지만,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업무에 임했다"고 강조했다. 2000년대 들어 인천 남항, 북항, 신항 등 외항들이 잇따라 개장한 데다, 내항에 있던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이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하면서 갑문을 드나드는 선박은 계속 줄고 있다.

오 전 소장은 "갑문을 통과하는 선박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지만, 후배들은 인천항의 '수문지기'라는 자긍심을 갖고 열심히 일해줬으면 좋겠다"며 "지난 50년 동안 인천항을 지켜온 갑문이 더 오랜 기간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