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신춘문예 등단 ‘과학하는 시인’으로 유명세

25년 만에 본격 작품 활동… 3-4번째 시집 선보여

“시인으로 종신하겠다는 약속 꼭 지키고 싶다”

전대호 네 번째 시집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  표지.  /글방과 책방 제공
전대호 네 번째 시집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 표지. /글방과 책방 제공

■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전대호 지음. 글방과 책방 펴냄. 162쪽. 1만2천원.

하는 수 없이 / 한 면만 보여주고 보며 살지만, //
다 알았다는 말, / 여기까지가 다라는 말, //
영영 미루기로 하자. //
아무리 달콤하더라도, /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
네가 누구건 무엇이건, / 너는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

- ‘바다’ 전문

수원 출신 전대호 작가가 네 번째 시집 ‘내가 열린 만큼 너른 바다’를 출간했다.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해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1995)’를 출간하며 신예로 주목받았다. 물리학을 전공해 ‘과학하는 시인’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둘째 시집 ‘성찰’(1997)도 출간했다.

이후 독일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 및 철학 전문번역가의 삶을 살았다. 지난 2022년 25년 만에 침묵을 깨고 세 번째 시집 ‘지천명의 시간’(2022)을 내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만인 올 5월 넷째 시집에서 90편의 신작을 발표했다.

이번 시집은 사람 냄새 물씬이다. ‘바다’, ‘그때 그 돌멩이가’, ‘원숭이도 없는 약장수’, ‘스크린 앞 석고대죄’ 등 제목만 봐도 세상 사는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한다.

6편의 연작 ‘나의 메피스토펠레스’에는 중학생 시절 매스게임, 빈 강의실 기타 연주, 언덕 위의 교회에 대한 회상을 담았다. 또 과학고 아닌 일반고 진학, 신춘문예 등단 등 에피소드는 시인의 오래된 앨범을 펼쳐보는 듯하다. ‘막둥이 찬가’는 네 바퀴 돌아 띠동갑 늦둥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아버지의 패전처리’는 투병 중인 아버지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지상 오십 미터 베란다 난간에 걸린 매발톱꽃. //
매는 찾아올 리 없고 나비도 날아든 적 없지만, //
나는 매발톱꽃 주위를 나풀거리는 하얀 나비를 상상하고, //
더 나아가 까마득한 상공애서 초인적인 초고화질 화면으로 //
꽃과 나비와 더불어 창 너머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나까지 //
또렷이 굽어보는 참매를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 //

- ‘매발톱’ 중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시인은 가족의 사랑을 소중히 기록한다. 동시에 동식물의 생태에도 사람 사는 세상만큼이나 치열한 규칙이 있음을 발견한다. ‘과학하는 시인’에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철학하는 시인’으로 묵묵히 변신 중이다.

시집 머리에 있는 “시인으로 종신(終身) 하겠다는 약속 꼭 지키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