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 개막작 리뷰
졸지에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의 현실
그들과 연대·역사 찾아가는 여정 그려

제12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한다는 의미로 스위스 출신 감독 이반 야그치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There Was Nothing Here Before)'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이반 야그치 감독은 어머니가 팔레스타인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갓난아이 때 집안 전체가 레바논으로 망명했고, 결혼 후 스위스에 정착했다. 애초 이 영화는 이반 야그치 감독과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이주한 그의 스위스 죽마고우가 공동 제작해 팔레스타인계와 이스라엘계의 우정을 다루는 내용으로 구상했다. 그 친구는 결국 이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되며, 법적 문제로 얼굴과 목소리가 지워진 채 등장한다.
감독은 10년 전 팔레스타인 내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홀로 이주한 친구를 이해해보려 그곳으로 향한다. 이스라엘계 스위스 집안으로 입양된 그 친구는 감독의 어린 시절 홈비디오에 늘 등장할 정도로 친했다. 그러나 감독은 철조망과 벽으로 둘러싸여 이스라엘군의 보호를 받으며 풍족하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의 풍경과 정착촌이 확장할 때마다 계속 터전을 잃는 팔레스타인 마을 풍경의 대조에 충격받는다.
수년에 걸쳐 친구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방문하면서 친구와 의견 대립이 잦아지고, 관계도 조금씩 틀어진다. 친구는 정착촌에 살면서 강성 시오니스트(유대민족주의자)가 됐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의 핏줄을 떠나서 정착촌 확장으로 '자신의 땅에서 난민이 되는' 지독한 아이러니의 팔레스타인 주민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갈라서고, 감독은 친구와의 우정을 그리는 대신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찾는 여정으로 영화의 방향을 바꾼다.

한국에선 처음 선보이는 영화다. 이스라엘 정착촌 확장 공사로 서서히 밖으로 내몰리고 있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이스라엘 정착촌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현실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들은 일자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착촌 철조망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매국노 소리 들을까 걱정"한다.
지난 17일 개막식 이튿날 오후 애관극장에서도 이 영화를 상영하고 '사이 토크'(감독과의 대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사이 토크에 참석한 이반 야그치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여러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고 보니 (친구와 헤어져) 홀로 남겨진 것만으로도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끝까지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반 야그치 감독 또한 영화 제작 과정,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갖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정체성은 이스라엘과의 적대적 세계관을 형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제목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친구를 포함한 이스라엘 정착촌 주민들이 늘 하던 말이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착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반 야그치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팔레스타인의 생생한 그때의 삶과 역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일까.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