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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회고록으로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사'만한 대작이 없다. 종전 직후 총선에서 패해 수상직에서 물러난 전쟁영웅은 회고록 집필에 전념했고,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분야를 초월한 탁월한 천재성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이다.

처칠급이 아니면 회고록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동시대인이 목격한 당대 사건에 대한 필자의 기억과 시선은 객관성 시비에 오를 수밖에 없고, 필자 자체가 논쟁적 인물이면 더욱 그렇다. 2021년 한 출판사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하자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보수단체와 탈북민 등이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우리 법원은 책으로 인한 피해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반면 법원은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 대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며, 관련 부분 삭제를 판결했다. 전 전 대통령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조비오 신부와 광주시민 등 왜곡 피해 당사자가 명확하다는 이유였다. 법원은 법리를 따랐을 테지만, 대한민국에 해를 끼친 범죄를 놓고 벌어진 김일성·전두환 회고록 논란은 가볍지 않다.

지난 17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출간했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 회담에서 김정은이 "딸 세대까지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한 사실을 공개하며 "상응 조치가 있다면 비핵화하겠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약속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로 물거품이 된 남·북·미 비핵화 외교가 두고두고 아쉬울 테다. 세차례 회동을 통해 김정은을 누구 보다 잘 아는 사람인 것도 맞다. 하지만 딸 김주애를 대동해 핵 전력 시험장을 순방하며 핵무장 유산을 물려주는 김정은의 행보를 전세계가 지켜보는 상황이다. 문 전 대통령이 도보다리에서 만난 김정은과,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김정은은 지킬과 하이드 만큼 양면적이다.

윤상현 의원과 나경원 당선자 등 국민의힘 인사들은 문 전 대통령을 "김정은의 대변인"이라고 비판한다. 문 전 대통령 지지 세력의 역공이 예상된다. 분단과 양극화로 '회고'도 쉽지 않은 한국 정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