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등 걸출한 문인들 배출한 곳
아버지 백시박, 장남 교육열 대단
오산학교에 '기부금 10원' 기록도
큰댁 '여우난골' 유명한 詩로 남아
정주와 오산학교는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백석보다 20년 앞서 춘원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 신리에서 태어났으며 백석보다 열 살 많은 김소월이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소월의 스승 김억도 곽산군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석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한 선우휘는 정주읍 남산리가 고향이다. '창작과비평'이라는 리얼리즘 계열의 유명한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1938년 외가인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친가는 정주군에 있었다.
백석의 어릴 때 이름은 백기행이었다. 1933년 12월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의 회보 제1호 표지에는 백석(白奭)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는 청진동으로 부쳐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영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훗날 잡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할 때는 모두 백석(白石)을 사용했다.
백석은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젊은 시절 백용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가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백영옥으로 개명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인 백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했다. '오산백년사'에 따르면 1923년 오산학교 기숙사 신축을 위한 기부금 모금을 모집할 때 지역의 유지들과 학부모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백영옥도 기부금 10원을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석이 오산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의 일이었다. 백석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도 아버지는 열성적으로 학교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오산학교에서는 강당을 짓기로 했는데 자금이 부족했다. 1928년 6월19일부터 8월1일까지 두 달 동안 지역별로 모금 책임자를 정해 기부금을 모으기로 했다. 이에 백석의 아버지 백영옥을 비롯해 다섯 사람이 황해도 일대의 기부금 모금 책임을 맡기도 했다. 그 후 백석의 아버지는 경성으로 이사해 '조선일보' 사진부 촉탁으로 입사해 1939년까지 일했다고 안도현은 '백석 평전'에서 밝히고 있다.
백석의 부모는 오산학교 앞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전까지 오산학교에는 기숙사가 없었다. 들판에 세워진 오산학교 주변에는 초가집 다섯 채가 있을 뿐이었다.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오면서 오산이라는 커다란 학교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자란 백석은 명절날이 되면 여우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큰댁으로 갔다. 그 경험이 '여우난골족'이라는 유명한 시로 남아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마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별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