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는 마음으로 이어지는것
'무조건' 생명구한 김은우 학생 찬사
그런데 세상엔 손에 휴대폰 들고
서 있기만 하는 '험한것'들도 있다
가령 누가 나더러 인간을 정의해보라고 주문한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냉큼 달려가 붙잡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그것을 맹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배웠다. 이를테면 언젠가 이 지면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에게 과자를 건네던 어린아이라든가 불길을 뚫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구출해 낸 춘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이들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맹자'를 백번 천번 읽었다한들 무슨 근거로 인간이 단지 두 발로 걷는 척추동물일 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짐작건대 맹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맹자도 당시 백성의 삶을 보고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것이고,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고 말했던 왕수인도 그 사실을 거리의 사람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글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들은 인간을 정의하기 이전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순간을 가정한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를 들어,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흔히 연민이나 동정심 정도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해되지만, 자세히 말하면 '측(惻)'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고 '은(隱)'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측은지심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헤아리는 마음이라 하겠다. 그런데 맹자는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까닭은 이익을 얻거나 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선설이다.
혹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가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맹자가 인간을 너무 좋은 쪽으로만 보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얼마 전에도 경북 포항의 연일대교 위에서 다리 아래로 투신하려던 40대 남성을 지나가던 여고생이 구한 일이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소중한 생명을 구해낸 주인공인 김은우(포항중앙여고 3학년)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조건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무조건'이라는 학생의 말에서 사람을 구하는 짧은 순간에 어떤 계산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맹자가 보기에 이런 행동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늘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며, 그 근거는 인간이 유달리 다른 존재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데 있다.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이 사람을 살리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확신을 인간이 가진 이성이나 다른 능력에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아무런 생각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에서 찾았다. 만약 위급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그사이에 생명을 구할 소중한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생명을 구한 김은우 학생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두 발로 서 있기만 하는, '험한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