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입구 도로가 위치한 장군탑
문화재 살리려 인근 주민들 告祀중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행패
깨끗이 치우고 가꿔온 여현섭 선생
무례함에 상처받아 "사회 험악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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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옥 출판인
지난 5월14일 석가탄신일 전야, 의왕시 청계산 입구의 도로가에 위치한 유적 '청계산 장군탑'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잊혀져가던 문화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근 주민 몇이서 떡과 술, 포를 놓고 고사(告祀)를 지내려는 찰나, 갑자기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어른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떡시루를 엎어버리겠다느니, 장군탑 비석을 넘어뜨려 땅에 묻어버리겠다느니 하면서 거칠게 대들었다. 주장인즉, "땅값 떨어지게" 남의 땅에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빌던 서낭당을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하는 땅 주인과는 달리 마을 노인들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제사 지내는 걸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신이라는 이유로 제사 풍속이 일소되었을 것이다. 이 장군탑은 돌무지 구조가 뚜렷한 고분(삼국시대로 추정)으로 지름 5~6m, 높이 3~4m의 크기이며 봉분 위에는 오래 전에 잘려진 고목 밑둥이 박혀있다. 봉분의 하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주변에는 30~40㎝ 크기의 냇돌이 많이 쌓여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돌을 던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장군탑의 역사는 팔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청계노인회에서 단기 4323년(1990)에 탑을 다시 세워 헌상(獻上)한다'라고 적혀있다.

'장군'이라는 명칭은 민속에서는 최영, 임경업, 강감찬, 남이 장군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굿을 할 때 무당의 몸주(혼령)가 되어 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집안의 행운을 빌어주는 선신(善神)이다. 한 마디로 '청계동 장군탑'은 만만치 않은 위인의 무덤으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성하게 여겨져 제사도 지내고 소원도 빌던 마을 공동체 공간이었던 것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카시, 찔레나무로 뒤덮인 채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던 이 공간을 깨끗하게 치우고 가꾼 것은 청계아파트단지 주민 여현섭 선생(83)이다. 그는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비석을 보고는 가시덤불에 묻혀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청소하기 시작했고 여건이 허락되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비석을 다시 세우고자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야자수발판을 깐 계단도 만들어 간단하게 제단도 갖춰 놓았다. 덕분에 지금은 봉분을 갖춘 큰 무덤 형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인근에서 청소하고 꽃을 심는 할아버지로 유명한 여 선생을 눈여겨 본 사람 중에는 역사학자도 있었다. 청계산 입구의 옥박골에 사는 신종원 교수(73·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지난해 이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여 선생을 발견했다. 평소 누가 이곳을 가꾸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둘은 이후 의왕시청을 찾아가 문화재를 돌보고 정기 점검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담당자는 "올해 예산은 다 소진되어 내년에 반영하겠다"며 호의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펼침막을 장군탑에 설치했다. 신 교수는 "오늘 땅 주인이 행패 부리는 것을 시청 담당자가 봤어야 한다"며 "저렇게 문화재를 훼손하겠다고 나오니 하루 빨리 안내판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신 교수는 "현재 비지정문화재 상태를 지정문화재로 정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힘주었다. 이런 장군탑의 사례가 학계에 보고된 것은 2009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천장군탑(千將軍塔)'이 유일하다는 것.

한편 여 선생은 땅 주인의 무례함에 큰 상처를 받아 이제 장군탑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무례하게 나오는데 식겁했다. 세상도 싫고 사람도 싫고 진짜 놀래버렸다. 조용한 산에 들어가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사회가 험악해졌다고 느꼈다."

그는 여러 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