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금 일대 군부대·철조망 등 너무 많아
대규모 신도시 개발로 '길거리 정맥' 자조
장명산, 백두대간 성지·교육장 거듭나야
"이 축석령은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이 되는데, 그 기복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 또한 좋다."(정조실록 35권)
정조는 '축석령'을 일컬어 '백두산의 정간룡'이라 했는데, 백두산~축석령~도봉산~삼각산~왕성(한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용이나 봉황과 같은 신비로운 생명체에 견주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왕이 직접 정맥 고갯마루 지세를 백두대간을 빌려 이야기한 것은 정조의 경우가 유일하다. 정조의 발언은 이미 조선 사회에서는 최소한 지식층을 중심으로 백두대간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당시 지리 인식은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산경표'와 '도리표'를 거치면서 읍치와 진산에 이어졌고, 백두대간으로 완성되었다.
역사서뿐만 아니라 고지도를 살펴보면 조선 사회가 한북정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1700년대 중엽 편찬된 '해동지도'의 함경도 안변부 군현 지도에서는 '한도대맥(漢都大맥)'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산경표'가 나오기 전에 한북정맥에 붙인 산줄기 이름이다. 1800년 이후에 나온 '광여도(廣輿圖)'에서는 이를 '한도거맥(漢都去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거맥, 대맥, 정간룡 등의 명칭은 여암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와 '산경표' 이후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정리되었다.
한북정맥은 1정간 13정맥 가운데 백두대간과 더불어 분단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백두대간이 비무장지대 내 삼재령에서 남북으로 나뉜다면 한북정맥의 23개 산과 고개 가운데 8개가 휴전 이후 미수복 지구인 북한에 있게 된 셈이다.
한북정맥 마루금 종주는 민통선 지역인 대성산이나 적근산을 제외하고 해발 740m인 수피령부터 시작한다. 복주산~광덕산을 지나 도봉산~북한산~노고산으로 이어져 파주 교하의 진산인 장명산(長命山, 102m)에서 끝난다. 도상거리 154㎞, 실측거리는 185㎞에 이르며, 지역적으로 강원도 철원·화천, 경기도 가평·양주·의정부·고양·파주, 서울의 도봉구, 강북구에 걸쳐 있다.
1990년대부터 한북정맥 종주가 시작된 이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사실은 마루금 일대에 군부대와 철조망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또한 30여 년 사이 도로 건설과 골프장, 주택단지 조성 등 대규모 신도시 개발로 인해서 경기도 북부 일원의 한북정맥은 '길거리 정맥'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로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파괴는 한북정맥의 막내인 장명산에서 발생했다. 신도시 건설을 위한 모래 야적장과 레미콘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해발 102m 정상을 포함, 산이 절반쯤 날아갔기 때문에 현재의 장명산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은 실제의 정상이 아니라 그보다 20m 낮은 해발 82m 지점에 불과하다.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장이자 초거대 쓰레기 산으로 솟았던 난지도를 해발 92m의 생태공원으로 부활시킨 경험이 적용된다면 원형 복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북정맥 장명산은 백두대간 보전의 성지이자 교육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백두대간과 정맥에 대한 이해 증진 및 교육과 홍보 활동을 펼치는 일이 시급하다. 또한 경기도의 보전과 이용이 조화되는 관리가 필요하다. 산림청에서는 정맥 자원실태변화조사를 지속하여 산림 변화상을 모니터링하고, 현재 10개소인 정맥 생태축 복원사업을 한북정맥에도 확대하는 등 정맥 보전에도 박차를 가하기를 기대한다.
/김우선 백두대간인문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