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특별법 통과 하루만에 폐기
국토부 '최장 20년' 새 지원책 발표
피해자들 "열악한 주거환경"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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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의 전세사기 피해건물 외벽자재가 떨어져 나간채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다. 해당 건물은 지난해 12월과 1월 두차례 외벽자재가 떨어져 나갔다. 2024.5.30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선(先)구제 후(後)회수(구상)' 방안이 담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하루 만에 폐기된 가운데 정부가 새로 내놓은 전세사기 피해 지원책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27일 '전세사기 피해자 주거안정 지원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피해 주택을 시세보다 낮은 낙찰가로 매입해 발생하는 차익을 피해자에게 임대료로 지원하는 게 뼈대다.

국토부는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지난달 28일 제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담은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반대 입장을 밝히며 이런 방안을 내놓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면서 개정안은 폐기됐다.

국토부는 피해자가 거주하던 주택에서 최장 20년(최초 10년+추가 10년)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즉시 퇴거를 원할 경우엔 경매 차익을 지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에는 지금의 전셋집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다.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속칭 '건축왕' 남모(62)씨의 피해자들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들은 그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집 천장 누수, 공용시설 고장 등으로 주거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주택 낙찰가가 높아질수록 경매 차익이 줄면 피해자가 돌려받을 금액도 적을 수밖에 없어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우려도 크다.

남씨 사건 피해자 A(44)씨는 "집에서 나가면 경매 차익으로 얼마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만 오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화장실 배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넘치는 이 집에서 10년 동안 머물라고 하는 방안은 피해자들에겐 '전세사기 수용소'로 느껴진다"며 "청년 피해자들이 직장을 옮기거나, 결혼·출산으로 식구가 늘어도 새 출발조차 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A씨가 거주 중인 주택은 지난해 12월 건물 외벽 자재가 강풍에 떨어져 인근에 주차돼 있던 차량이 파손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건물 보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토부 지원책에는 기존 전세사기 특별법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불법 건축물 입주자, 신탁사기 피해자, 다가구주택 입주자의 피해 주택도 매입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국토부는 임기를 시작한 제22대 국회에서 관련 내용을 담은 전세사기 특별법을 개정해달라고 제안할 계획이다. 특별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LH 등 공공주택사업자가 경매에 나온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적극적으로 매입할 방침이다.

하지만 전세사기 특별법에 명시된 경매 유예기간(1년)이 지난 관계로 최근 경매가 재개되면서 피해 가구들은 정부안이 곧바로 시행되지 않으면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불법 건축물인 줄 모르고 전세계약을 맺었던 피해자 B(41)씨는 "작년에 LH 공공매입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6월 중에 경매 매각 기일이 잡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국토부 피해지원총괄과 관계자는 "경매 차익이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최근 경매시장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감정가의 20~30%는 피해자들이 받아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미 낙찰돼 퇴거한 피해자들에게는 인근 지역 공공매입주택을 공급하고, 특별법 개정 전 LH가 피해 주택을 매입하는 경우에도 경매 차익 지원을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국회에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신탁사기 피해 주택, 불법 건축물인 주택을 서둘러 매입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김태근(세입자114 운영위원장)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피해 주택을 사들이고 그동안 사각지대로 여겨왔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부분은 폐기된 특별법 개정안의 대부분을 수용한 방안"이라면서도 "피해자들에게 많은 경매 차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LH 감정가 대신 법원 감정가로 계산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22대 국회에서 '선구제 후회수' 방안과 이번 정부의 지원 대책을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