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승객 모시느라 혹사한 '마부'
피로조차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
작가만 이따금씩 뒤척이며 중얼
잠잠해지면 의식의 작은 등불만
깜박거리며 밤과 꿈 가로질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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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어쩌다보니 일년 반째 마감의 연속이다. 나는 피로에 사로잡혀 있다. 피로는 아침 햇살에 닿으면 툴툴거리며 육중한 몸을 옆으로 비켜준다. 뇌가 호통을 치며 오늘 할 일들을 읊어대기 때문이다. 우선 강의가 있고, 강의에 앞서 그보다 긴 강의준비가 있다. 짧은 글이지만 서평 마감도 있고, 무엇보다 단편소설 마감이 발등에 떨어져있다.

나는 사륜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채찍을 휘두른다. 지붕에는 강의에 쓸 책, 학생들의 습작, 어제까지 작업한 인쇄물, 점심으로 먹을 빵과 커피 등 되는대로 꾸려놓은 짐이 실려 있고 안에는 '작가'라는 승객이 미간에 인상을 팍 쓰며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마차에 오르는 다른 승객들을 민폐꾼처럼 노려본다. "내가 마감을 제때 못하면 전부 당신들 때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강사'라는 승객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봐요, 빨리 좀 못 가겠어요?"라고 마부에게 조바심을 드러낸다. '필자'라는 승객은 코너를 회전하느라 로데오 말처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급히 서평을 완성한다. 그는 항상 마감의 스릴을 즐기며 이럴 때 글이 더 잘 나온다고 너스레를 떤다. 구석에 자고 있던 '나무늘보' 승객이 하품을 쩍 하더니 무례하게도 모두의 무릎위로 길게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번 달 생활비 등등을 한가로이 계산한다. 잘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를 하는 통에 나무늘보는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다. "다들 비켜! 딸이 올 시간이야." '꼬마'가 들어온다. 꼬마는 열한 살짜리지만 마차에 탄 승객 누구보다 무겁다. 꼬마가 아기였을 때는 이보다 몇십 배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마차의 바퀴가 바스라질뻔 했고, 승객들은 모두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벌벌 떨 정도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강사가 나서 힘겹게 진창에 빠진 바퀴를 건져냈고, 그 후 만 세 살이 되어 꼬마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는 한 시간에 1미터 정도 느리게 이동한 전력이 있다. 그 때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워진 꼬마인가.

마차에 올라탄 꼬마는 자기만의 마차 도면을 그리는데 열중해 있다. 부드러운 민트색 말이 이끄는 꼬마의 마차는 달콤하고 우아하지만 솜사탕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단독으로 굴러다니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꼬마의 마차는 나날이 튼튼해지고 있다. 엄마는 꼬마의 스케치를 뿌듯하게 내려다본다.

엄마와 꼬마를 내려주고, 강의를 마친 강사가 한숨 돌리는 동안 마차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작가가 정 가운데 앉아 노트북을 편다. 그런데 작가 내부에 있던 '독자'가 셔츠 사이에서 나오더니 책을 펼쳐 열심히 읽기 시작한다. 독자는 작가보다 훨씬 늙었고, 작가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나서려는 경향이 있다. 독자가 책장에 침을 묻혀가며 넘기다가 뭔가를 메모하더니 갑자기 정지했다. 그 사이 작가가 독자의 손에 들려있던 연필을 받아 노트에 적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날의 문장이 시작된다. 이 마차가 운행하는 목적이자 연료인 문장, 수고에 비해 너무도 드물고 느리게 몇 줄의 문장이 적힌다. 노트북에는 이야기가 담기기 시작한다. 마차와 승객들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가도, 꼬마도, 마차도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부'다.

여러 승객을 모시느라 지친 마부는 이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고르지 않게 운행되는 마차의 리듬 때문에 작가의 글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부는 사실 너무 혹사했다. "더는 못 버티겠는데." 마부는 옆에 있던 검은 윤곽의 형체에게 채찍을 넘겨주고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한다. 마부석에 웅크린 유령같은 검은 형체. 그것은 피로다. 피로가 마차를 몰고 있다. 자정이 지난 밤, 피로조차 너무 피곤해 잠이 들었다. 밤이 그들을 덮고 마차는 꿈속의 어두운 미로 위를 달린다. 오직 작가만이 이따금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린다. "이건 모두 꿈이야. 까먹지 말고 내일 적어야겠어…." 그러나 작가마저 잠잠해지면 마차의 좌우에 달린 의식의 작은 등불만이 깜박, 깜박 흔들리며 밤과 꿈을 가로질러 간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