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별세 소식에 하염없이 눈물
서가의 '민요기행' '남한강' 꺼내 봐
신경림 문학의 '고갱이' 담겨 있어
민족시인 평가만으로 진가 다 몰라
귀한 것 높은 곳에 있지 않음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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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벌써 7, 8년 되었나? 더 되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때는 가을이 아니었나 싶다. 아들과 함께 만주에를 갔다. 좀처럼 아버지와 여행하지 않으려는 아들을 상대로, 그럼, 들어가기는 같이 장춘으로 들어가고 중도에 헤어져 각기 귀국하자 했다. 어려운 조건으로 겨우 아드님의 승낙을 얻어내서 장춘으로, 연길로, 용정으로, 명동촌까지 이 분을 모셔갔다.

명동촌은 우리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다. 동주는 슬프고도 맑고 깨끗하고 높은 시인이었다. 흔히들 동주가 젊어서 세상을 떠난 것이 그의 순수의 요인인 것처럼 느끼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순수를 향한 의지가 그로 하여금 영원히 순수한 시인으로 죽어서도 살게 한 것이라 해야 한다.

명동촌의 동주 생가가 문이 닫혀 있어 관리인이랄까 마을 촌장이시랄까 어느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데 한 작은 버스가 와 선다. 관광철이 아니었다. 나는 아들과 단 둘이 동주의 고향을 찾은 것이었다. 버스도 그냥 버스려니 했는데 뜻밖에 낯익은 목소리들, 한국 사람들 소리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자세히 바라보는데, 선생이시다. 신경림 선생이 몇몇 분들과 함께 명동 마을을 찾으신 것이었다.

선생은 웃으며 다가오셔서 저 친구는 누구냐고 물으셨고, 내가, 후후, 아드님께 인사를 시켜드린 후, 나만 들을 수 있으시게, 속 깨나 썩이겠구만, 하고 위로를 해주셨다.

그렇게 하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그 후에 선생께서 수술하시고 회복되셨다고 시간을 내주신 적도 있고, 늘 좋은 분들과 산행하기를 즐기신 선생을 북한산 승가사 언저리에서 우연히 만나뵙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선생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안 좋은 일들이 겹쳐서 그랬는지 하염없이 눈물이 솟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다 지난달 25일 열린 추모식에서 선생의 시 '길'을 낭송하며, 나는, "이 가슴 아프고 엄중한 자리에서, 선생이 낮게 계셨을 때나 높이 높이 계셨을 때나 늘 북돋워 주시고 다독여 주시던 어렵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선생을 위해" 당신의 시를 바쳐올리겠다고 했다.

이 말에는 단 한 점의 심정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선생이 가신 후, 나는 내 서가에 늘 꽂아두고 있던 선생의 책 '민요기행'과 장시집 '남한강'을 꺼내 보았다. 이 책들은 모두 힘들었던 1980년대에 나온 것으로, 어렵지 않게 초판을 구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신경림 문학의 고갱이와 같은 것이 이 두 권의 책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 마지 않는다.

누가 신경림 시를 논의하며, 민중시다, 민족시인이다 말한다면, 그 평가가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시인 신경림의 진면목을 그것으로 다 말한 것 같지는 않은 듯도 하다.

나는, 지금, 1956년의 등단 이후 당신의 고향과 이름없는 사람들의 일터에서 보낸 당신의 그 십년 낙백의 나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제천 쪽으로, 충주 쪽으로, 또 당진, 예산 같은 내포 쪽으로, 안면도로 떠돌던 '민요기행'의 숭고미를 생각한다. 이 살아 있는 삶의 현장, 노래의 현장 아니고 어디서 선생의 시의 원천을 찾을 것인가. 그렇게 당신이 만난 사람들은 민중이되 민중이 아니고, 민족이되 민족이 아니었다고 해야 한다. 모든 추상명사는 덧없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 그것은 선생이 만난 살아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연일 것이다.

선생이 그렇게 떠나신 후 세상은 마치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나만의 심정 아니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들 하신다, 세력이나 파당을 초월하신 분이셨다고, 큰 어른이셨다고. 우리는 높이 되기를 원하지만 정녕 귀한 것은 높은 곳에 있지 않음을 작은 키를 가지신 선생은 찬찬히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담백했고 그 담백함 속에 정직의 힘이 담겨 있던, 그 목소리, 그 표정, 어디서 다시 뵈올 수 있을까?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